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월대 (문단 편집) === 태조 즉위 이후 === ||<-4> '''{{{#670000 만월대 역사}}}''' || || '''{{{#670000 재위년도}}}''' || '''{{{#670000 연도}}}''' || '''{{{#670000 사건}}}''' || '''{{{#670000 비고}}}''' || ||'''태조 1년''' ||'''[[919년]] 1월''' ||'''창건''' ||'''궁성 건축. 정전 천덕전, [[나성]] 발어참성.''' 현판은 모두 [[최언위]]가 씀.|| ||'''광종 12년''' ||'''[[961년]]''' ||수리 ||광종이 도감(都監)을 설치했다는 기사가 있어 큰 공사였을 것으로 추정. || ||'''목종 12년''' ||'''[[1009년]] 1월''' ||화재 ||궐내 기름창고에 불이나 천추전(千秋殿)까지 불 탐. || ||'''현종 2년''' ||'''[[1011년]] 1월''' ||완파 ||[[여요전쟁|거란의 침입]]으로 파괴. || ||'''현종 2년''' ||'''[[1011년]] 8월''' ||축성 ||발어참성 증축, [[황성]]으로 전환. || ||'''현종 5년''' ||'''[[1014년]] 1월''' ||재건 및 증축 ||정전이 회경전으로 변경. || ||'''현종 20년''' ||'''[[1029년]] 8월''' ||축성 ||[[나성]] 건설 완료. 21년이 걸린 대공사. 개경의 도성제 완성. || ||'''정종 6년''' ||'''[[1030년]] 2월''' ||화재 ||궁성 정문 승평문의 행랑이 불타 남쪽에 있던 어사대(御史臺)까지 불 탐. || ||'''문종 24년''' ||'''[[1070년]] 11월''' ||증축 ||전쟁에 대비할 군수물자 창고 증축. || ||'''인종 4년''' ||'''[[1126년]] 2월''' ||전소 ||[[이자겸의 난]] 당시 [[척준경]]이 파괴. || ||'''인종 10년''' ||'''[[1132년]] 1월''' ||재건 시작 ||재건 이전엔 별궁 [[남궁#s-3|연덕궁]]·[[연경궁]]·[[수창궁]]에 거주. || ||'''인종 16년''' ||'''[[1138년]] 5월''' ||재건 완료 ||본궐 내 전각, 대문 등 이름 대대적 개변. || ||'''의종 10년''' ||'''[[1156년]] 10월''' ||증축 ||본궐 후원 증축. || ||'''명종 원년''' ||'''[[1171년]] 10월''' ||전소 ||멈출 수 있는 화재였으나 [[정중부]], [[이의방]]이 방치. 후원만 건재. || ||'''명종 9년''' ||'''[[1179년]] 3월''' ||재건 ||4월엔 천령전까지 복구. || ||'''명종 9년''' ||'''[[1179년]] 5월''' ||재건 중단 ||각지 반란, 군부 혼란 등으로 인해 공사 중단. || ||'''명종 10년''' ||'''[[1180년]] 5월''' ||재건 재시작 ||9월 대관전 복구, 11월 강안전 복구. || ||'''명종 12년''' ||'''[[1182년]] 9월''' ||재건 완료 ||내전, 목친전 등 다수 전각 복구, [[좌우춘궁|여정궁]] 복구. || ||'''고종 12년''' ||'''[[1225년]] 10월''' ||화재 ||편전 4채 및 전체 본궐 중 137칸 소실. || ||'''고종 19년''' ||'''[[1232년]] 7월''' ||폐쇄 ||강화도 [[고려궁지]]로 천도, 본궐 폐쇄. || ||'''고종 23년(?)''' ||'''[[1236년]](?)''' ||완파(?)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훼손.[* 사서엔 언제 본궐이 무너졌는지 나와있지 않다. 허나 1235년까지 수창궁의 기록이 나오는 점, 1236년에 몽골이 경기도, 경상도까지 들어간걸 보면 이 해에 개성도 무너졌을 가능성이 크다.] || ||'''원종 11년''' ||'''[[1270년]] 7월''' ||재건 ||개성 본궐로 환도, 재건 시작. || ||'''충선왕 3년''' ||'''[[1312년]] 1월''' ||증축 시작 ||대대적인 증축. || ||'''충선왕 4년''' ||'''[[1313년]] 3월''' ||증축 완료 ||동사강목 기록. 총 410여 칸. 상왕궁으로 일시 전환. || ||'''공민왕 11년''' ||'''[[1362년]] 3월''' ||'''소실''' ||'''[[홍건적의 난]]으로 인해 완파, 폐궁.''' || 태조가 궁예를 몰아내고 [[태봉국 철원성]]에서 즉위 후 다시 송악으로 돌아와 옛 저택 자리에 궁궐을 지으니 바로 지금의 만월대다. 광종이 '수영궁궐도감(修營宮闕都監)'을 설치해 크게 증축했고 현종 때 재건하며 모양을 크게 바꿨다. 인종 때 재건하며 궁궐 건축의 이름들을 싹 바꿨다. 태조 때 지어진 이래로 공민왕 전까지 [[여요전쟁|현종 때 한번]], [[이자겸의 난|인종 때 한번]], [[무신정권|명종 때 한번]], [[여몽전쟁|고종 때 한번]], 총 4번 완전히 날라가버린 적 있다. 대개는 자기 대에 제깍제깍 다시 세웠지만, 고종 때만은 강화도로 가느라 방치해 놓고 이후 원종이 다시 세웠다. 원종 대 재건 이후 수리가 잘 안된 듯 하다. 충선왕은 재위 3년 차에 편전 강안전(康安殿)이 낡았다며 투덜거린 기록이 있다. 1년 간 재수리를 거쳐 410여 칸을 가진 궁궐로 만들었고 이 때 신하들이 원의 예절을 따라 축하했다고 한다. 충선왕이 상왕으로 있을 때 잠시 상왕궁(上王宮)으로 바뀌었다. 이때 정궁은 충숙왕이 있던 현덕궁(玄德宮). 실권을 충선왕이 장악했기에 연경궁(본궐)을 충선왕이 차지한 것이다. 충숙왕은 국왕인데도 밀려난 것. 그래서 사실상 계속 법궁의 자리를 유지했다. 이후 크게 무너지는 일 없이 유지됐지만 공민왕 때 홍건적이 들어와 다시 파괴되었고 이번에는 두 번 다시 재건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