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역사 (문단 편집) ===== [[명나라]]의 지배와 [[청나라]] 치하 ===== 명나라는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여진 및 [[우량카이]]의 지배를 위해 요동도사, 대녕도사, 누르칸도사를 만주 지역에 설치했으나, 실제로는 요동도사만이 군사 기능을 할 수 있었고 대녕도사나 누르칸도사는 [[책봉-조공관계]]의 도구로만 작용하였다. 명은 수백 개로 분열된 [[여진족]], [[우량카이족]]을 개별적으로 책봉하면서 분할 통치를 꾀했지만, 오히려 조공권을 통합하고 이를 통해 성장하는 여진 공동체가 성립되면서 만주에는 국가가 다시 태동하기 시작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Qing-Nurhaci.jpg|align=center&width=300]]|| ([[누르하치]]. [[만주]]의 마지막 독립 [[국가]]인 [[청나라]]의 [[시조]]) 마침내 건주좌위에서 출발한 [[누르하치]]의 가계가 [[후금]]을 일으켜 만주 통합에 성공하고, 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요동, 요서, [[산해관]]을 놓고 힐항하며 중국 진입을 시도했다. [[청태종]]의 대에는 특히 당시 후금의 구성원들을 '[[만주]]'로 총칭하고 [[청나라]]를 건국하며 새로운 역사 구획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원숭환]] 등의 분전으로 청의 입관은 최대한 저지되었으나, [[이자성]]에 [[이자성의 난|의해 명이 멸망하고]]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주며 청은 중국에 진입한다. 이후 [[남명]], [[삼번의 난]], [[정성공]] 등을 제압하며 청은 중국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청나라]]의 만주족들은 유사시 왕조가 멸망했을 경우 후퇴할 장소로 남겨놓기 위해 잔존한 만주인을 기인(旗人), 즉 [[팔기군]] 휘하 제도로 편성하여 농장을 마련해 주었고, 17세기 후반 이후 만주 지역을 만주인 외의 다른 민족이 들어갈 수 없는 '봉금(封禁)지역'으로 만들었다. 또한 만주족들의 대부분이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중원]]으로 이주해 나갔기에 만주의 인구는 급속히 줄어들었다. 영토는 광활한데 사람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중원에 있던 가난한 [[한족]]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기회의 땅인 만주로 몰래 넘어갔다. 여기에 [[백두산정계비]] 설치가 무색하게 [[조선]]인도 몰래 만주로 이주하고 이는 후에 [[간도]] 분쟁의 배경이 된다. 물론 만주족들이 이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봉금정책을 항상 강경하게 추진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러시아가 극동 진출을 위해 남하하고 [[아이훈 조약]], [[베이징 조약]]을 통해 청의 영토를 강탈하자 만주를 보험지역으로 두고자 했던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청은 국토 방어를 위해 봉금 정책을 폐지하였고 이에 한족들은 대거 유입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틈관동]]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