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국 (문단 편집) === 만주국 수립 이후 === || [[파일:0005175341.jpg|width=100%]] || || 영화 [[마지막 황제]]의 한 장면에 [[역사저널 그날]]에서 자막을 붙인 사진 || [[1932년]] [[1월 28일]]에 [[상하이]]에서 [[일본인]] 승려들이 습격을 받는 [[마옥산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세계 각국의 관심을 만주에서 떼어내 상하이로 옮겨놓은 사이에 하얼빈 점령이나 만주국 건국을 촉진하려는 계략이었다. 관동군의 의뢰를 받은 상해주재 무관 보좌관 다나카 소령에게 매수 당한 중국인들이 범인이었다.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고 각국의 시선이 세계적인 경제 대도시인 상하이에 집중된 사이에 만주국 건국에 착수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부의 [[랴오닝성]](遼寧省),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을 장악한 [[관동군]]은 정부와 군 중앙의 견제를 뿌리치고 만주 각처에서 이른바 '만몽(滿蒙) 신국가'의 건국 운동을 벌이도록 선동했다. 1932년 2월 창춘(長春)에서 이른바 '신국가 건설회의'를 조직, 국호는 '대중(大中)', '대동(大同)'이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최종안으로 '만주국'이 선택되었고 대동은 연호로 사용되었다. 또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패도정치와 대응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신국가의 정체(政體)를 두고서는 공화파, 군주파, 민주파로 나뉘어 격론을 하였는데, 일단 당분간 "형체상 [[공화국]], 실질은 군주제에 의한 민주제를 채용"하여 국가원수의 명칭을 "집정(執政)"으로 하는 [[공화국]]으로 출발하기로 하고, 나중에 상황을 봐서 절대군주제나 입헌군주제로 바꾸기로 하였다. 그리고 집정으로는 [[청나라]]가 망하고 폐위된 [[황제]] [[선통제]]를 옹립했다. 이리하여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성립을 선언하면서 신징(新京)을 수도로 삼았다.[* 신경, 지금의 [[지린성]] [[창춘시]](長春).] 지금도 창춘에 당시 [[위만황궁|만주국 황궁]](건국 당시에는 집정부)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연호를 대동(大同)이라 하였으며, 탕강자에 머물고 있던 푸이(선통제)는 3월 9일 장춘에 도착, 이 날 오후 시청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대전(大典)에서 장징후이로부터 순금의 [[옥새]]를 봉정받고 집정 취임을 선포하였으며,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오후 5시에 의식을 마쳤다. 신흥 만주국은 일본 이하 17개국에 대해 승인을 요구하는 대외통고를 발했다. 그러자 열국은 단지 통고를 받았다는 회답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마저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일본 정부]]가 정식으로 만주국을 승인한 것은 1932년 9월 15일이었지만 이에 이르기 위해서는 [[5.15 사건]]에 따른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의 암살이라는 불상사를 거쳐야만 했다. 일본은 같은 해 9월 일만의정서(日滿議政書)에 조인하고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며, 이어서 [[엘살바도르]], [[바이마르 공화국]],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 [[이탈리아 왕국]], [[코스타리카]], [[불가리아 왕국]], [[스페인 제2공화국|스페인]], [[헝가리 왕국]], [[도미니카 공화국]] 등의 일부 나라가 승인하였다. 당연히 [[국제 연맹]]의 승인은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곧 만주국(그리고 배후의 관동군)은 1933년 [[열하사변]]을 일으켜 열하성(熱河省)마저 병탄했다. 나라별 반응은 다음과 같다. * [[미국]]: '우리는 중국인을 동정하지만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는 없다. [[먼로 독트린|아시아 문제는 아시아인이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자위를 위해 전쟁한다는 일본군의 명분과 달리, 일본군이 만주를 넘어서 진저우를 비롯한 [[중화민국]] 화북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이때부터 미국은 상당히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서 스팀슨 선언을 발표하고 일본의 행동을 비난하며 만주국 불승인 정책을 고수했다. 왜냐면 당시 만주는 미국의 이익에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중국에 진출한 서구 열강들 중에서 비교적 후발주자였던 미국은 다른 열강들이 이미 이권을 선점한 화남 지역이라든지 산동반도 같은 지역보다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만주지역의 이권과 상품시장에 관심이 있던 상태였다. 19세기 후반 이후로 미국은 이미 중국에 석유(주로 석유 등을 밝히기 위한 연료. [[등유]]라는 말의 기원이기도 하다.)제품 수출 등 상당한 교역관계가 있었고 일찌감치 스탠다드 오일과 씨티은행(화기은행) 등이 중국에 진출해 있었다. 만주지역의 상품시장 확보와 이권 확보에 있어서 만주에서 일본의 영향력 확대와 일본의 만주침략은 미국 기업들이 이익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일본이 실질적으로 미국의 만주에 대한 이권을 보장해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도 1920년대까지는 비록 2차 영일 동맹이 깨지고 점차 일본을 잠재 적국으로 인식하기는 했지만 미국이 결정적으로 일본을 적성국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계기가 일본의 만주 침략이었다. * [[중화민국 국민정부|중화민국]]: 굉장한 충격을 받았고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제3차 초공작전]]과 [[1차 양광사변]]이 중지되었으며 [[왕징웨이]]나, [[후한민]] 같은 반장파들이나 반란 중이던 광시 파벌들도 잠시 총을 내려놓고 초계파적인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이미 군사적 지원은 장쉐량이 거부했던 시점에서 물건너간 상황이고 섣불리 일본에 맞섰다간 전면전으로 번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소용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국제연맹에 제소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여겼다. 이후로도 만주국을 인정하진 않아 [[러허 사변]] 이후 일본이 산해관을 점령하며 내려오자 휴전을 위해 1933년 5월 31일 관동군 대표 [[오카무라 야스지]] 소장과 중국군 대표 웅빈 사이에 당고에서 성립된 이른바 [[당고정전협정]]으로 사실상 만주국을 인정하게 되었다. 일본은 만주국 이상으로 더 확대하지 않고 중국은 장성 남쪽에 비무장 지대를 만들고 베이징 서남쪽으로 철수하여 상호 구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패배적 협정이다. 막상 협정을 맺고 나서도 일본은 내몽골과 화북을 계속 침략하여 몽골에서는 [[데므치그돈로브]]의 [[몽강연합자치정부]]를, 화북에서도 [[지둥방공자치정부|괴뢰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때서야 중국도 만주국을 문제삼았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국가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천지 차이이다. 예를 들면 한국 대통령이 북한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수교하려면 헌법부터 바꿔야 한다. 때문에 일본은 중국의 만주국 승인을 여러 차례 요구했고 중일전쟁 초기의 협상에서 일본이 내건 조건도 장제스의 만주국 승인이었다. 이후 중국의 방침은 힘을 길러서 빠르면 1939년, 늦으면 1943년 쯤에 무력으로 만주를 되찾자는 것이었다. * [[중국공산당]]: 당시 중국공산당의 세력은 확대일로이긴 했으니 국민당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게다가 중국공산당이 수립한 해방구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양자강 유역의 내륙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국민당에 포위된 상태였으므로, 일본군 및 만주국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이에 따라 장제스와 국민당이 조국을 침략해오는 일본군하고는 안싸우고 오히려 내전만 격화시키고 있다면서, 자신들과 함께 항일전쟁에 나서자는 선전공작을 강화하였다. 국민당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홍군]]은 장제스가 3차초공작전 중지를 결정하자, 대외적으로 이것을 홍군의 위대한 승리라고 선전하면서 전력을 보강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어찌하던 국민당군의 공격을 버텨낸 홍군은 자신감에 차올랐으며, 병력과 물자를 보충해서 전력을 끌어올린다. * [[소련]]: 만주사변을 미일 항쟁의 개막으로 보아, 당분간은 시베리아에서 육군력을 증강하기 위해 일대 국가와 화평 상태 유지만을 생각했다. 1935년 3월 23일 사실상 만주국을 승인하였고, 1941년 4월 13일에 다시 조약을 맺으며 정식으로 승인하였다. 소련은 [[하얼빈]]과 [[만저우리]]에, 만주국은 [[블라고베셴스크]]와 [[치타(러시아)|치타]]에 각각 영사관을 개설하였다. * [[영국]]: 영국의 이권이 화중, 특히 [[양자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하이]] 쪽에만 관심이 있었다. 상하이 사변 이후에야 미국과 함께 움직이려고 하였지만 미국 스팀슨 국무장관의 강력한 공동 행동 제안은 거절하였다. [[혐성국|오히려 한다는 말이 일본과 같은 활동적 나라의 발전을 미개한 중국을 위해 방해하는 것이 어떻게 맞겠냐며 일본의 만주 침탈을 지지하다시피 했다.]] 다만 말은 그렇게 했어도 1932년 국제연맹 총회에서는 일본의 만주 점령 비난 결의안을 찬성하였다. *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영국과 함께 1932년 국제연맹 총회에서 일본의 만주 점령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할 때 같이 찬성하였다. 만주국의 국토는 앞서 말한 동북 3성과 열하성에 이르러서 면적이 한반도의 6배였으며, 영불독 3국을 합친 것보다 컸다. 그리고 인구는 3천만 명이 되었다. [[1934년]] 1월이 되자, 당초 어정쩡하게 '집정'이라는 이름으로 봉합했던 국가원수 명칭을 만주국 건국 만 2년을 맞는 [[1934년]] 3월 1일부로 제정을 선포할 방침이 정해졌다.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칭제할 때와 비슷하게도 푸이를 황제로 세우라는 청원서를 조작하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그러면서 "절대 (청조) 복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종전대로 "왕도정치"를 행하는 것이지 전제정치(專政)을 꾀하는 것이 아님"을 달아두긴 했다. 아무튼 이 해 [[3월 1일]] 푸이는 "국호를 대만주제국,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고친다"는 조서를 반포하였으며, 이른 아침 현재의 창춘인 당시의 신징(新京, 신경) 교외에 설치된 제단에서 교제(郊祭)의 의식을 마치고 정오에 [[위만황궁|만주국 황궁]]에서 즉위식을 가지면서 정식으로 대만주제국 [[황제]]에 즉위하였다. 3월 2일에는 연회가 열렸고, 4일에는 신징에서 열병식, 5일에는 하얼빈에서 관함식을 가졌다. 한편 일제는 내몽골에 역시 괴뢰정권인 [[몽강자치연합정부]]를 세웠다. 하지만 곧 [[왕징웨이 정권]]의 내몽골 자치구가 된다. 1908년 만주의 인구는 1,583만 명이었지만, 1941년에 가면 인구가 5천만 명으로 증가했다. 게다가 만주는 워낙 넒다보니 일본은 만주와 몽골 지역을 일거에 점령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동북 4성과 몽골을 영역으로 하고 푸이를 우두머리로 내세운, 일본 군부가 제조한 중국인 정권이 바로 만주국이었다. 따라서 이후 군부가 만주의 실권을 장악하는 상황으로 이어짐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만주국이란 관동군이 세운 그야말로 완벽한 일본의 괴뢰국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