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파식적 (문단 편집) === 신라 이후의 행보 === 신라 멸망 후 고려 [[광종(고려)|광종]] 때 경주객사에 동경관을 지으면서 여기에 보관했다고 한다. 조선 초기부터 다시 이 옥피리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 도중 화재로 인해 유실되어, [[광해군]] 때 경주 부윤이 신묘한 옥피리가 없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해서 옛 모습을 상고해 새로 만들라는 명을 내린다. 이것이 맨 위 사진의 노란색 옥피리다. 그러다 조선 숙종 때인 1690년, 동경관에서 근무하던 향리 김승학이 폭우로 무너진 동경관의 담장을 보수하다가 전란 중에 누군가가 감추었던 것으로 보이는 문제의 옛 옥피리를 찾아냈다고 한다. 김승학은 피리를 집으로 가져가 죽을 때까지 보관했지만 그가 1707년 죽자 관아에 그 사실이 알려졌고 이것이 옛날 유실된 진품 옥피리로 추측하고 압수해 다시 경주 동경관에 보관했다. 이것이 맨 위 사진의 옥피리 유물이다. 조선 말에는 [[삼기팔괴]]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을 정도로 과거부터 인지도가 꽤 있었던 유물이었다. 이 두 옥피리는 1909년 일제 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경주 동경관에서 서울 [[창경원]] 어원박물관에 옮겨 보관하도록 명했고 서울에 있다가 [[국립경주박물관]]이 세워지자 다시 경주로 옮겨 수장고에 보관했다. 관람객에게는 오랫동안 비공개였다가 2011년 특별전시회에서 만파식적이라는 이름으로 임시로 진열됐고 특별전이 끝난 뒤 다시 수장고에 들어가 비공개 상태다. [[https://gyeongju.museum.go.kr/kor/html/sub02/0202.html?mode=V&d_mng_no=105&mng_no=130|국립경주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소개된 만파식적]] 도중에 잃어버리고 새로 되찾았다는 시점에서 이미 옛 신라 때 만파식적 진품일 가능성은 크게 줄었지만 현재 전해진 두 옥피리도 최소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유물은 확실하며,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것을 신라의 만파식적으로 생각하고 오랫동안 보물로 보관해왔기 때문에 설령 신라 진품이 아니라도 상징적 가치가 크고, 역사적 가치가 없는게 아니다. 일단 조선시대 일반적인 피리와는 그 형식이 좀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유물의 탄소측정법이나 형태를 자세히 연구하면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일 가능성도 없진 않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