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말라리아 (문단 편집) === 말라리아 치료제와 세계사 === 말라리아는 의외로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식민지 시대와 관계되어있다. 더 정확히는, 말라리아 치료법이 널리 퍼지면서 아프리카 침략이 시작된 것이다. 본래 유럽인들에게 있어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사하라 사막 그 자체부터도 고난이긴 했지만, 그 밑으로 가면 아프리카 숲에 살고 있는 모기들이 떼거지로 달려들어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로 사실상 들어갈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중심부에는 무섭고 사악한 마법의 힘이 도사린다고 오랫동안 믿어 왔는데, 1899년에 영국인 작가 [[조지프 콘래드]]가 발표한 소설인 [[어둠의 심연]]이 바로 그런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러던 1620~30년대, 치료제가 발견되기 시작한다. 남아메리카 페루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해당 지역 원주민들이 '키나'라는 나무의 껍질을 달여 먹는 식으로 말라리아를 치료하고 있었던 걸 발견했다. 이후 1670년대 영국 런던과 남부 지역에서 말라리아가 발생하자 한 사기꾼이 예수회 선교사들이 보낸 키나나무껍질 분말(일명 '예수회 가루')을 자기가 만든거라고 속여 치료했고, 영국 왕 찰스 2세와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황태자가 이 방법으로 말라리아에서 치료되자 키나나무 치료법이 더욱 더 확산되었다.[[https://contents.premium.naver.com/monicakim/knowledge/contents/220305133249483ST|#]] 그리고 1820년, 마침내 프랑스 과학자 펠리티에와 카방투가 키나나무 껍질에서 '키니네' 성분을 추출해내는 데 성공하며 치료제가 출시되었다. 이를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프랑스군에 열심히 처방해 매우 탁월한 효과를 봤고, 키니네를 이용한 치료가 대중화된다. 이로 인해 말라리아의 장벽이 풀리자 유럽 열강들은 1800년대부터 미칠듯한 식민지 침략과 학살을 시작하게 된다. 한편 예수회가 독점 공급하는 키나나무는 구하기 매우 어려워 값이 비싸고 수량이 한정되어 있었다. 이에 19세기, 영국은 인도대륙과 스리랑카에서, 네덜란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에서 키나나무를 재배하게 된다. 이로 인해 현재 키나나무의 최대 산지는 인도네시아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견제로 키니네의 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독일은, 자국의 화학산업을 이용해 1924년 파마퀸을 합성했다. 키니네는 적혈구 속의 원충에, 파마퀸은 간 속의 원충에 효과가 있었다. 이후 독일은 효과가 더 강하고 부작용이 더 적은 퀴나크린을 출시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일본이 키니네의 산지인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자 본토의 키니네는 풍족했지만 파병군에게는 부족했던 미국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생포한 이탈리아/독일 병사의 휴대품에서 최신 약품인 클로로퀸을 발견해 클로로퀸을 합성하기 시작했다. 다만 일본이 합성약품을 먹으면 황달과 성불구에 걸린다고 흑색선전해 뉴기니에 상륙한 미군 95%가 말라리아에 걸려 앓아누웠다. 이후 베트남전쟁에서는 치료제에 내성을 가진 말라리아가 출현해 미군은 1971년 메플로퀸을 만들었고, 1972년 중국은 개똥숙에서 유효성분 칭하오수를 추출해 아르테미시닌을 개발한다. [[https://www.medifonews.com/mobile/article.html?no=11662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