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말레리안 (문단 편집) == 탄생 배경 == 말러는 생전에는 지휘자로 최고의 명성을 얻었지만, 작곡가로서의 그는 [[안톤 브루크너]]처럼 호불호가 심하게 갈렸다. 자신의 곡이 초연에서 대대적으로 성공한 적은 교향곡 3번과 8번 정도밖에 없었으며[* 교향곡 2번은 초연 당시에 대중들의 반응은 좋았지만, 평론가들에게는 혹평을 들었다. 참고로 3번은 전곡 초연 전에 부분적으로 연주되었을 당시에는 평가가 나빴다고 한다.], 생전에 그와 친했던 [[브루노 발터]]나 [[오토 클렘페러]] 등의 지휘자들에 의해 간간이 연주될 뿐이었다. 그나마도 [[나치]]의 유대인 탄압 정책과 금지곡 지정에 의해 유럽에서는 사실상 씨가 끊겼다. 물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나 조지 셀 등 다양한 지휘자들이 말러를 연주하기도 했지만 푸르트벵글러의 경우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같은 가곡들을 주로 지휘했고,[* 사실 젊었을 적에는 1~4번 교향곡을 연주한 기록이 남아있지만, 녹음도 남아있지 않을 뿐더러 푸르트벵글러는 교향곡 작곡가로서 말러는 그다지 좋은 평가는 내리지 않았다.(공교롭게도 푸르트벵글러도 말러처럼 자신을 '지휘도 하는 작곡가'로 여긴 것은 물론, 생전에는 지휘자로서만 유명했고 작곡가로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다. 실제로 푸르트벵글러는 피아노 협주곡 [[교향적 협주곡(푸르트벵글러)|1곡]]과 3곡의 교향곡을 작곡한 수준급의 작곡가이기도 했다.)] 조지 셀은 간간이 교향곡도 지휘하기는 했지만 이는 그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실력 테스트(?)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이랬던 그의 음악이 주목받게 되는 것은 1960년대, [[레너드 번스타인]]에 의해서이다.[* 마침 1960년대의 시작인 1960년은 말러가 태어난 1860년으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되는 해였고, 그 다음 해인 1961년은 말러의 사망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미국 최고의 지휘자로 주목받는 그가 말러의 교향곡 전집을 녹음하고, 그가 주최하는 청소년 음악회에서까지 말러의 음악을 소개하면서 말러 음악의 부흥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번스타인의 말러 교향곡 전곡은 최초의 녹음도 아니었고, 같은 시기에 모리스 아브라바넬,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라파엘 쿠벨릭에 의해서 말러 교향곡 전곡 녹음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번스타인의 파급력이 컸던 것은 분명하다. 거기에 1960년대 미국, 유럽에서는 [[히피]]문화와 같이 정신적 공허함을 채우고자 하는 바람이 일었고, 철학적인 소재의 말러는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1999년부터 2003년 사이에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국내 최초로 말러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여 크게 주목받았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말레리안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후 잠시 주춤하던 말러 붐은 2010-11년 탄생 150주년, 사망 100주년이 겹치면서 다시 한번 크게 폭발한다. 전세계적으로 말러의 음악을 연주하였고, 한국에서도 [[서울시립교향악단]], [[제주도립교향악단]], [[KBS 교향악단]]에서 말러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