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매관매직 (문단 편집) == 개요 == [[賣]][[官]][[賣]][[職]] 글자 그대로 관직을 돈,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재물을 받고 파는 것을 말한다. 현대에는 부패와 [[국가 멸망]]의 상징으로 볼 정도로 인식이 좋지 않으나 놀랍게도 전근대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당히 오랫동안 인재를 채용하는 '''정식 제도'''였다. [[과거 제도]]를 통해 유능한 인재를 뽑았다는 인식이 있는 동아시아만해도 과거제는 송대에야 자리잡은거고, 그 이전 시대까지는 [[향거리선제]], [[구품관인법]] 등이 있었다고는 하나 결과적으로는 엽관주의적, 족벌주의적 선발이 이뤄졌다. 그리고 과거제가 자리잡은 시대인데다가 바로 코 앞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명, 청, 조선 모두 연납(捐納)과 [[공명첩]]이 제도적으로 존재하였다. 또 중근세 서구권은 아예 매관매직과 [[엽관주의]], [[족벌주의]] 외에는 관료 등용 제도가 없었다. 서구의 경우 차라리 매관매직이 그나마 유능한 관료를 뽑는 제도였다(...). 유럽의 경우, 매관매직조차 비교적 가까운 시대인 중세말~근세의 산물이다. 중세까지만 해도 사적 인간관계 속에서 확인 가능한 범위 내에서 능력이나 혈통(신분)으로 인재를 뽑았다. 때문에 이 시대 인물 생애들 살펴보면 부모 빽이나, 교수 추천서나, 높으신 분들 인맥과 추천이 매우 중요하다. 이 시기 귀족들이 명성에 집착하는 것도 그 관계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혈통이나 매관으로 뽑는 것은 의외로 능력과 상관 관계가 있기는 했다. 생각해보라. 기사나 관료를 뽑으려고 하는데, 재산도 충분하고 상류층 사회에 연줄도 있어서 이들 사이에서 돌아가는 교육/양성체계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 중 쓸만한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평생 사무나 무술을 접하지 못하고 땅을 일구면서 살아가는 농민의 자식 중에서 쓸만한 사람이 많을까? 서구권 기준으로, 매관매직이 필수였던 이유 중 하나는 '''행정 비용을 관료 개인의 재산과 권력으로 지불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기 때문이 크다.''' 동양권도 사정은 비슷했는데, 지방에서 세금을 걷으면 중앙에서 할당한만큼의 세금을 중앙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알아서 지방에서 행정 비용으로 쓰고, 행정 비용이 부족하면 지방 관료가 알아서 어떻게든 해야했다. 중앙이 행정 비용을 지원해주는 일은 거의 없었고, 중앙이 걷은 조세의 90% 가량은 군사비로 지출했다.[* 이는 중앙에서 관리하는 것이 경제적이지 못했던 점도 한몫했다. [[고대 로마]]의 빵바구니로 불린 이집트 곡물의 사례는 물론, 중세에도 이탈리아 도시들이 근방에서 생산한 곡물을 수입하는 것보다 거리가 더 멀더라도 해상으로 운송해온 곡물을 수입하는 것이 저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등, 운송 상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도 중국 왕조들은 [[수나라]] 시대부터 남북으로 대운하를 파기 전까지만 해도 남방의 잠재성을 알면서도 그 부를 쉽게 끌어올 수가 없으니 개발이 더뎠고, [[고려]]나 [[조선]]에서도 수로를 통한 조세 운반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산업 혁명]] 후 기술 발전으로 육해를 막론하고 운송비용이 크게 격감하고, 대량생산을 통하여 단가가 줄어드는 등 여건이 크게 완화되면서 해소되기 시작한다.] 때문에 관료들은 사적인 인간 관계와 현지 주민들과의 협력을 통해서 행정을 처리했으며, 이 때에는 '''사적인 재산'''을 털어서 그런 비용을 벌충하거나, 권력을 통해 현지에서 [[징발]][* 말이 징발이지 전근대의 징발은 그냥 병사들 시켜서 강도질한 것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고대 로마의 기록을 보면, 로마 병사가 서신을 전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다리가 아팠는지 지나가던 농부에게 말을 징발하겠다고 외쳤고, 로마 병사는 라틴어로 말했지만 그 농부는 그리스인이어서 병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로마 병사는 칼을 빼들어서 위협하여 농부에게 말을 삥뜯었고 병사는 서신을 전달하면서 그 징발 사실을 보고했다. 병사는 합법적으로 권한을 행사한 것으로 간주되어 처벌 받지 않았다.]한 인력과 돈으로 채웠다. 당장에 고대 로마의 거대한 공공건축물들은 전부 정치가들이 출마하면서 사재를 털어서 건설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관료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충분한 사적인 재산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재산=능력이라는 계산이 성립했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경우, 현지에서 [[공명첩]] 등을 발행해서 부자들에게 기부금(?)을 받아서 재정을 확충하기도 한 것이다. 전근대에는 이 정도로도 인재 수요를 감당할 수 있었으나, 18세기에 이르러 사회와 조직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더 능력이 검증된 사람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고, [[계몽주의]]의 영향과 중국의 과거제를 모티프로해서 시험을 통한 관료 선발 제도가 영국에서 처음 시작된다. 현대적 관료제와 '''시험을 통해 유능한 사람을 뽑는다는 개념은 19세기 중반 이후 시행된 정말 생긴지 오래 안 된 따끈따끈한 개념인 셈.''' 물론 그 특성 상 부작용이 쉽게 나타나 재정난이 심화되는 경우는 매우 많았다. 특히 수취권, 수조권을 가진 관직을 매매하면 필연적으로 수탈이 나타나 국민들에게 고통이 전가되었다. 유럽의 경우 세금을 걷는 직책을 [[징세청부업자]]에게 팔아서 그런 현상이 나타났고, 동아시아의 경우 지방관을 그렇게 팔면 심지어 중앙 정부에도 조세를 안 보내는 사례가 나오기도 했다. 근세 유럽의 경우 매관매직을 비교적 효율적으로 운용했으나, 관료의 수 증가→관료에게 지급할 급여 증가→매관매직→관료의 수 증가 라는 함정에 빠져서 재정위기가 심화되기도 했다. 그 재정 위기가 [[프랑스 혁명|가장 심각하게 터진 나라]]가 [[프랑스 왕국]]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