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맹모삼천지교 (문단 편집) == 실체 == 이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별로 없다. 원래 열녀전이 쓰여진 시기는 맹자의 시대보다 몇백년이나 뒤이며 그 사이의 기록에는 딱히 비슷한 일화가 나오지 않는다. [[춘추전국시대]]의 문헌에는 이런 이야기가 거의 보이지 않으며 그저 세간에 떠도는 전설이거나 유향의 창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맹자는 자신의 학문 경력에 대해서 '사숙(私淑, 사적으로 혼자 배웠다)했다'고 간단히 언급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 일화에 나오는 문화는 춘추전국시대보다는 [[전한]] 시대의 생활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춘추전국시대 [[유가(제자백가)|유가]]에서 장례식을 흉내내는 것은 딱히 이상하거나 해괴할 것이 없다. 원래 춘추전국시대 유가의 사회적 업무는 "관혼상제의 전문가"였다. 오히려 [[공자]]에는 이런 [[관혼상제]] 의식을 어릴 때부터 흉내내서 놀이로 삼았으니 그야말로 '예'를 아는 성인다운 일이었다는 식의 일화가 전해진다. 심지어 공자는 자신이 여러 재주를 가진 이유가 어릴 적에는 천한 신분이라 갖은 일을 많이 했기 때문[*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이런저런 기술을 많이 알고 있다.]이라는 발언도 했다. 무엇보다도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면서 배우지 않아도 인간의 본래 마음을 잘 살핀다면 충분히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는데, 해당 고사에서는 공부 환경 때문에 이사를 가는 것이 매우 이상해 보인다. 즉, 고사의 얘기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름 아닌 [[고자(전국시대)|고자]]의 주장으로, 이는 맹자가 심하게 비판했던 것이었다. 물론 맹모와 맹자는 다르지 않냐고 말할 수 있는데 어찌되었든 맹자의 주장이 맹모의 행동을 공격한 셈이 되어서 효(孝)를 중시했던 맹자 본인의 입으로 전승되기에는 힘든 얘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유향이 창작할 때 맹자의 서사에 섣불리 공자와 닮은 점을 부여하려고 하다가 유향이 공자와 맹자의 차이를 간과해 버린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보이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