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카 (문단 편집) ===== 18세기의 혼란 ===== 복위한 자이드는 1666년 7월 사망할 때까지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그의 사후 아슈라프 위원회는 후계자를 놓고 분열하였다. 다수는 원로이자 자이드를 후계자로 택한 압둘라의 아들 하무드를, 소수는 사드 이븐 자이드를 지지하였다. 결론을 내지 못한 아슈라프는 오스만령 제다 총독이자 하람의 셰이크 이마드 아가에게 결정을 맡겼고, 그는 사드에게 킬라흐(예복)를 보내었다. 사드는 1672-82년간 샤리프직을 유지한 바라카트 3세 등 몇몇 친척들에게 축출되었으나 1694년부터는 대체로 계속 집권하였다. 하지만 1705년 사드가 사망한 후 사드, 사이드, 압둘라의 세 아들들과 다른 왕공들 간의 내전이 이어졌다. 혼란기는 1732년 마수드 이븐 사이드가 집권한 후 20년간 통치하며 수그러들었고, 1752년 그가 사망하자 동생 무사이드가 계승하였다. 그는 집권 직후 타이프를 근거지로 메카를 두 차례 공격하던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와 그해 휴전에 합의하였다. 그러던 1756년 8월 26일, 무사이드의 기존 동맹이던 사이드 압둘라가 순례차 와있던 오스만령 [[다마스쿠스]] 총독 체트지 압둘라 파샤와 연합해 하람 사원을 장악하고 아미르를 칭하였다. 그 다음날 메카 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무사이드는 승리를 거두며 반란을 진압하였다. 하지만 시리아의 임지로 돌아간 체트지 압둘라는 1758년 8월 술탄의 칙령을 받아 무사이드를 폐위하고 동생 자파르를 샤리프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핫즈 카라반이 떠난 9월 자파르는 형에게 양위하였다. 복위한 무사이드는 네 무프티들의 증언과 함께 술탄 [[무스타파 3세]]에게 체트지 압둘라를 고발하였다. 샤리프의 손을 들어준 술탄은 체트지 압둘라를 직위해제하고[* 다마스쿠스 총독 + 아미르 알 핫즈.] 무사이드를 재차 책봉하였다(1760년 2월). 한편 1760년대 말엽 바라카트 가문의 압둘라 이븐 후세인은 이집트의 알리 베이 알 카비르와 연합, 후자의 아미르 알 핫즈인 무함마드 베이 압둘 다하브와 무사이드를 폐위하려 하였다(1770년). 이에 무사이드는 시리아 측의 아미르 알 핫즈인 우스만 파샤 앗 사디크와 연합해 그에 맞서 샤리프위를 지켜내었고, 그 직후 동생 압둘라에 충성을 서약하곤 사망하였다. 다만 압둘라는 즉위 직후 동생 아흐마드에게 폐위되었고, 후자는 다시 이집트의 알리 베이에게 폐위되었다. 그후 이집트 군의 지지를 얻어낸 압둘라 이븐 후세인이 위조된 칙령과 함께 메카에 입성하였다(1770년 7월). 다만 3달 후 아흐마드는 베두인들의 도움으로 메카를 수복하고 복위하였다. 1773년 2월 조카 수루르 이븐 무사이드에게 폐위되었다. 그 후 샤리프위를 놓고 양측 간에는 15번의 충돌이 벌어졌고, 그 마지막인 1779년 여름의 전투에서 아흐마드는 포로가 되었다. 수루르는 그를 제다에 감금한 후 9년간 통치하며 안정을 회복하곤 1788년 1월에 사망, 카디자 영묘에 묻혔다. 사후 동생 압둘 무민이 샤리프가 되었으나 그는 며칠만에 다른 동생 갈립에게 양위하곤 그의 휘하에서 수 차례 신흥 세력인 디리야의 와하비 세력에 대한 원정에 나서는 등 활약하였다. 1778년 갈립은 9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후다일 부족과 함께 반기를 든 동생들을 메카 부근에서 격파하였다. 그럼에도 반군은 이듬해 싸키프 부족과 함께 타이프를 점령하였다. 이에 갈립이 베두인을 모아 토벌군을 편성하자 동생들은 울라마의 중재 하에 그와 휴전을 맺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