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카 (문단 편집) === 중세 === 무함마드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제국]]기에도 메카는 종교적인 역할만 수행하였고, [[히자즈]]의 정치적 중심인 메디나에 있었다. 따라서 656년 이후 칼리파의 거점이 아라비아 반도 외의 [[시리아]]와 [[이라크]], [[이집트]] 일대로 이동한 후에 메카를 포함한 히자즈 지방은 메디나에 파견된 총독들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던 2차 [[피트나]] 때에 [[압둘라 이븐 주바이르]]가 [[야지드 1세]]의 칼리파 세습을 반대하며 히자즈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무슬림 이븐 우크바 휘하의 진압군이 파견되었다. 683년 여름 알 하라 전투에서 이븐 한잘라 휘하의 안사르 부대를 격파한 무슬림은 메카로 남하하던 중 병사하였다. 지휘권을 이어받은 후세인 이븐 누마이르 앗 사쿠니는 9월 24일 메카를 포위, 최후 통첩에도 압둘라가 항복을 거부하자 도시를 포위하였다. 공성전이 이어졌고, 우마이야 군대의 투석기에 의해 카바는 큰 피해를 입었다. 무함마드 사후 불과 51년 만에 이슬람 최고의 성지가 무슬림들에 의해 파괴된 것이다. 그 해 말엽 야지드의 사망 소식에 후세인 휘하의 원정군은 철수하였고, 칼리파를 칭한 압둘라는 카바를 보수하였다. '칼리파' 압둘라 이븐 주바이르는 683~682년까지 9년간 메카를 수도로 한때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과 [[이집트]], [[이라크]], [[이란]]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684년 이후 우마이야 조는 서서히 반란 세력들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였고, 692년 초엽 우마이야 대장군 알 핫자즈 이븐 유수프 휘하 2천 병력이 남하하였다. 이전의 포위와 달리 파괴와 학살을 원치 않았던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지시에 따라 알 핫자즈는 압둘라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자 칼리파의 승인 하에 메디나의 증원 병력과 함께 메카를 포위하였다. 도시는 봉쇄되었고, 아부 쿠바이스 산에 설치된 투석기에 의해 포격 당하였다.[* 9세기 역사사 알 발라두리에 의하면 [[우마르]]의 아들 압둘라의 요청으로 최소한 핫즈 순례 기간에는 포격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포위가 장기화되며 핫즈 순례 기간이 다가오자 알 핫자즈는 개인 자격의 순례자로서 입성을 요구했으나 거절 당하자 분노하여 카바에 대한 포격을 지시하였다. 다만 그 직후 폭풍이 몰아치자 이를 천벌이라 여긴 병사들은 포격을 중단하였다. 이에 핫자즈는 단순 자연 현상이고 오히려 승리의 증표라며 포격을 지속하게 하였다. 6개월간의 포위 끝에 알 핫자즈가 사면을 약속하자 1만에 달하는 수비 병력이 항복하였고, 그 중엔 압둘라의 아들들도 있었다. 이에 최후를 직감한 압둘라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나가 적진에 돌격하다 전사하였다(692년 가을). 이로써 2차 피트나는 종결되었고, 알 핫자즈는 히자즈의 총독이 되었다. 칼리파의 지시에 알 핫자즈는 전후 메카에 대한 전후 복구에 착수하였다. 본래 무함마드가 건설하고 우마르, 우스만이 증축한 카바는 683년 1차 포위 당시 크게 파손되었고, 이를 재건한 압둘라는 기존의 정육면체 형태 대신 옛 [[이브라힘]] 시절 카바의 벽인 하팀을 포함한 직육면체 형태로 변형하였다.[* 이는 아이샤의 하디스에 의거하여 무함마드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 한다.] 알 핫자즈는 이를 철거, 683년 이전으로 되돌렸고 현재까지 그 형태로 이어져 내려온다.[* 한편 후일 아브드 알 말리크는 압둘라가 세운 카바의 철거를 후회하였다고 한다. 다만 우마이야 조의 지지자들은 압둘라의 잘못을 교정했다며 찬양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