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종(조선) (문단 편집) === 출생과 즉위 === [[1534년]](중종 29년) [[태음태양력|음력]] 5월 22일, [[중종(조선)|중종]]과 [[문정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문정왕후]]가 [[노산|세는나이 기준으로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현재도 30대 중반 이상 나이의 산모는 노산으로 분류된다. 하물며 가임연령이 되면 되도록 출산을 하던 [[조선시대]]에 30대 중반의 산모는 상당히 고령의 산모였고, 또한 이 당시에는 평균 결혼연령이 10대 중반이었기 때문에 빠르면 30대 초반에 손자, 손녀를 보던 시절이었다.] 귀한 아들이었다. [[조선/왕사|왕]]이 되기 전에는 ''경원대군(慶源大君)'[* [[봉호]]는 [[인천광역시|인천]]의 옛 지명인 경원군(慶源郡)에서 유래했으며, [[1539년]]에 아버지 [[중종(조선)|중종]]으로부터 군호를 책봉되었다.]이었으며 [[인종(조선)|인종]]이 즉위할 때까지만 해도 그저 전왕인 아버지 [[중종(조선)|중종]]의 아들이자 현왕인 [[인종(조선)|인종]]의 [[이복형제|이복동생]]일 뿐이었으나 [[인종(조선)|인종]]이 즉위한지 8개월만에 [[급사]]함으로써 [[조선/왕사|왕]]이 되었다. 어릴 때 양눈에 [[눈병|안질]]이 있었다는데 이복형 [[인종(조선)|인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승하]]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윤임]]이 "경원대군은 [[눈병|안질]](眼疾) 때문에 눈이 안 보이니 [[조선/왕사|왕]]을 못한다"는 핑계로 그를 [[조선/왕사|후계선상]]에서 제외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언적]] 등이 경원대군의 [[조선/왕사|승계]]를 지지하고 [[문정왕후]]가 강력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포기하게 됐다. 따라서 생모인 [[문정왕후|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으로 섭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와 [[1547년]](명종 2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대윤의 대신들과 [[사림]]들이 대거 [[숙청]]되었고, 권세를 얻은 소윤(왕의 외숙부 [[윤원형]]) 일파의 [[부정부패]]는 엄청나서 [[백성]]들의 반감을 샀으며 [[보우(조선)|보우]]를 통한 [[불교]] 중흥은 유학자들의 반감을 샀다.[* 그야말로 유교 성리학자 [[사대부]] 입장에서는 [[외척]] + [[사화]] + [[불교]] + [[여자]]의 [[막장]] 4종 [[세트]].] 그래서 그런지 유명한 도적 [[임꺽정]]의 활약도 바로 명종 재위년 기간이었다. [[윤원형]], [[이기]],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허자]] 등 소윤 일파의 좌장들 중에서 [[윤원형]]과 이기를 제외한 소윤들은 "[[윤임]]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는 [[환상]]에 시달리다가 명종 즉위 3년도 못 되어 다 죽어버렸다. 유일한 생존자 허자의 경우에는 [[윤원형]]의 심복인 [[진복창]]을 [[탄핵]]했다가 [[윤원형]]의 미움을 사서 숙청당했다. 윤원형 급의 세도를 누린 [[이기]]는 존재가 [[윤원형]]에 묻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윤 유인숙, [[유관]] 등을 죽인 명종 집권의 주역 중의 주역으로 77세까지 장수하며 권세를 누렸지만 명종의 친정 전에 죽었다. 명종이 본격적으로 무엇을 하기 시작한 당시에 남은 사람이 [[윤원형]] 뿐이라 마지막 주자로서 책임을 다 짊어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