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종(조선) (문단 편집) === 치세 ===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조선)|중종]]의 실정은 조선의 [[재정]]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고 이에 따라 재정은 어려움이 많았는데 [[1550년]](명종 5년)에는 더이상 줄 [[땅|토지]]가 없어 직전법을 폐지해야 했다. 좋게 보면 [[공신]]과 대신들의 땅 불리기가 공식적으로는 중단된 거지만, 냉정하게 보면 [[연산군]]과 [[중종(조선)|중종]] 시절의 갖은 혼란으로 인해 기존의 토지가 사문화/유명무실화 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만 이 조치로 인하여 관료는 국가에게 명목상으로조차 땅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고대에 땅과 사람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귀족을 포섭하는 것으로 출발했던 한반도의 관료제도가 완전히 직업적인 성격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친정을 시작한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인해 [[경복궁]]이 [[근정전]]만 남긴채 편전과 침전 구역이 모두 불에 타 소실됐다. 하지만 명종은 [[경복궁]] 재건을 신하들에게 엄청나게 닥달함으로써 불과 1년만에 모두 [[복원]]해낸다. [[1555년]](명종 10년) 정월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가진 추상성을 보완해 충족성을 기하고자 편찬된 유권해석서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가 반포되었다. 조선 전기의 법적체계가 마무리되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있는 성과라 할 것이다. [[1555년]](명종 10년) 5월, 70여 척[* 한 배당 대략 100명 정도 있으니 모두 합쳐 7,000명이다.]의 [[왜구]]가 [[전라도]] 서남 해안에 대규모로 침입하여 [[영암군|영암]], [[장흥군|장흥]][* 장흥부사 [[한온]]은 장렬히 전사했으나 임시 부사인 하급 장수는 싸워보지도 않고 그냥 내빼 도망갔다.], [[강진군|강진]][* 광주목사가 지휘를 했고 [[병력]]도 많았으나 후퇴했다. 우도 방어사인 김경석은 강진이 공격을 받는데도 지원하지 않았다.], [[진도군|진도]] 일대를 휩쓸며 [[강간]],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는데 이게 왜변 중 가장 규모가 큼과 동시에 마지막으로 벌어진 '''[[을묘왜변]]'''이다. 조정은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남치훈을 방어사로 임명하고 전주부윤 [[이윤경]][* [[이준경]]의 친형이다.]을 파견하여 진압에 어려움을 겪기는 했어도 결국 [[영암군|영암]]에서 적을 크게 파하여 그들을 겨우 몰아내었다. [[삼포왜란]] 이후 생겨난 비상 기관인 '''[[비변사]]'''는 이 때부터 국가 전반의 상설 정치로 기구화한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을묘왜변]] 이후 [[조선]]은 [[수군]]력을 크게 강화하게 되고 [[판옥선]]의 도입, [[총통(무기)|총통]]의 개량, [[조선 수군|수군]]의 정비, 권관제의 도입 등의 [[개혁]]을 추진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수군]]의 활약을 뒷받침하게 된다. 줄어든 군마를 [[명나라]]에서 [[수입]]하려고 해서 [[사림]] 계열 신하들의 비판을 심하게 받는 등 알고 보면 명종도 [[밀덕후]] 기질이 있다. 그러나 [[이준경]], [[이윤경]], [[한온]], [[변협]][* 해남 현감], [[김빈]][* 우수사], [[최인]][* 전라도 진도 군수.]을 제외한 지역 군수, 현감들과 일부 지도부[* 김경석·남치훈.]는 모두 도망가거나 제 때 지원하지 않았고 이 일은 명종 대 [[조선군]]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다만 동시기 명나라는 '''고작 72명'''의 왜구들을 한명도 죽이지 못하고 900명이 전사하기도 했는데 그에 비해 같은 시기 [[조선]]은 제주도에서 벌어진 2차 을묘왜변때 '''70명으로 14배가 넘는 1000명의 적을 무찌른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 [[고려]]나 [[척계광]]의 [[원앙진]] 전법을 도입한 [[명나라군]]조차 14:1이라는 숫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긴적은 없었다. 출처 : [[https://www.newsn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60120]]].] [[1559년]] 아직도 [[윤원형]]의 세(勢)가 강성할 때 명종은 [[윤원형]]의 권세를 제약하고 싶어 했고 아버지 [[중종(조선)|중종]]이 썼던 방법 즉, 권신을 다른 신하로 하여금 제거하는 시도를 한다. 명종은 특히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역대 왕비|왕비]]인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을 크게 중용하면서 [[윤원형]]을 약화시키는데 이에 대해서도 [[문정왕후]]는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종(조선)|중종]] 때 [[김안로]]와 [[윤원형]]이 그랬던 것처럼 [[이량]] 역시 자신의 세를 불리는데 급급했고 애초에 [[권신]]으로 권신을 제약하는 것은 제도를 등한시한 채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명종의 계책은 실패했고, [[이량]]은 완전히 폭주하여 자기 외조카 [[심의겸]]을 비롯한 다른 외척들을 해치려다가 열받은 명종에게 [[윤원형]]보다도 먼저 숙청당했다. 명종은 왕비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외아들 [[순회세자]]를 낳았지만 [[1563년]](명종 18년) [[음력|음]][[9월 20일]], 12살이던 순회세자의 갑작스런 [[요절|죽음]][* '''《[[명종실록]]》 29권, 명종 18년([[1563년]], 명 가정(嘉靖) 42년) 9월 20일 (을미) 2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ma_11809020_002|#]].] 이후[* 이로 인해 [[조선/왕실|조선 왕실]]의 [[조선/왕사|적통 직계]]는 명종의 대에서 끊겼다. 그리하여 차기 왕은 중종의 7남이자 명종의 이복형이었던 [[덕흥대원군|덕흥군]]의 3남이자, 명종 입장에선 [[조카]]인 하성군이 명종의 [[양자(가족)|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어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조선)|선조]]가 되었다. 명종은 외아들 순회세자가 죽은 뒤 다시 아들을 보기 위해 노력했는데 꿈 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어느 [[여자]]를 얻으면 아들을 볼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그 여자를 [[후궁]]으로 삼았지만 끝내 아들을 보지 못하고 승하했다.]로는 [[신하]]들이 없는 곳에서 [[성격]]이 괴팍해져서 《[[명종실록]]》에는 "명종이 [[조울증]]과 [[홧병]]을 앓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종은 주로 [[내시]]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문제는 명종이 [[조울증]]을 앓다 보니 기분에 따라 총애하는 [[내시]]가 툭하면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외아들 [[순회세자]]를 잃은 이후로 더 심해졌는데 단순히 총애의 정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술을 먹으면 주사가 [[내시]]를 하옥시키거나 국문시키는 거라고 봐도 될 정도라 내시들이 "신하들에게는 [[성군]]이면서 우리들에게는 [[걸왕|걸]][[주왕|주]]나 다름없다"고 투덜거린 기록까지 남아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