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종(조선) (문단 편집) === 사망 === [[1565년]](명종 20년) [[4월 6일]], 어머니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기 전에 권세를 많이 약화시켜 놓은 [[윤원형]] 일파를 모두 숙청하고 억불 정책에 돌입하는 등 정치를 안정시킨다. 한편, 계속된 [[사화]]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지방에서 힘을 기르던 [[사림]]은 [[문정왕후]]와 [[윤원형]] 등의 척신들이 자리를 비우자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이 때는 [[성종(조선)|성종]] 때처럼 [[훈구파]]도, [[연산군]] 때처럼 반사림적인 [[임금]]도, [[중종(조선)|중종]] 때처럼 [[사림|신진 사림]]을 제어할 세력[* [[남곤]] 등 도학파, 정국공신, [[김안로]].]도 없었기에 그야말로 순수 지방 사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렇게 조정을 가득 채운 [[사림]]은 [[조광조]] 일파처럼 왕도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고 자연스레 [[성종(조선)|성종]] 시절 [[대간]]의 따박따박이 [[부활]]하게 되었으므로 명종은 이래저래 [[힘]]을 쓸 수 없었다.[* [[교과서]]나 일반적인 [[서적]]에는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명종은 그것을 지원했다"는 식으로 나와 있지만 [[문정왕후]] 사후 재위기간이 고작 2년이었기에 명종의 진정한 [[색깔]]인지, 아니면 주위에 휘둘린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례로 당시 [[관료]]들은 "진정한 [[현자]]를 등용하면 [[나라]]가 안정될 것"이라고 보고 대학자 [[이황|퇴계 이황]]을 등용하기를 줄기차게 간청했는데 나중에는 "뭐 적당한 자리 있음 알아보든가"라는 식으로 나왔다고 한다. 다만 나중에는 '[[현자]]를 초대하나 오지를 않는구나'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라고 한 적이 있다. 불러도 오지 않는 [[이황]]에 대한 섭섭함은 [[사림]]에 대한 우호적 태도로 볼 여지가 있다.] [[1567년]](명종 22년) [[음력|음]][[6월 28일]], 명종도 34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경복궁|경복궁 양심당]]에서 [[사망|승하]]하게 되는데 자신의 정치는 물론 [[조선/왕사|후사]](後嗣)를 구상하기에도 너무 짧은 2년이었다.[* [[사망|승하]]하기 전부터 [[유성]]이 떨어지는 등 갖은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 시약청을 설치하자마자 다음 날 새벽(축시, 새벽 1시~3시)에 [[죽음|훙서]](薨逝)했다. 워낙 갑작스럽게 [[죽음|승하]]한터라 대신들은 물론 [[어의]]들도 제대로 병석에 입시하지 못해 [[우왕좌왕]]하였다. 《[[명종실록]]》의 이 부분을 보면 사관의 신랄한 비판이 가득하다.][* '''《[[명종실록]]》 34권, 명종 22년([[1567년]], 명 가정(嘉靖) 46년) 6월 28일 (신해)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ma_12206028_001|#]].] [[파일:강릉.jpg]] 능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강릉(조선 명종)|강릉]](康陵)'''으로 [[조선/역대 왕비|중전]] [[인순왕후|인순왕후 심씨]]와 [[쌍릉]]의 형식으로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