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더니즘(미술) (문단 편집) == 모더니즘 사조 == 이와 같이 겉보기에는 사실적이지만 실상은 이상화되어 있는 예술들이 19세기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점차 이러한 흐름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역사, 사회적 배경은 [[모더니즘]]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잠시 다시 위에서 설명했던 4가지 미술 분류를 다시 생각해보자. 1) 전통적, 보수적 예술 2) 상업화, 자본화된 예술. 3) 새로운 시대에 맞는 예술을 하길 추구했던 예술. 우리가 흔히 아는 모더니즘 예술. 4) 1번의 시대착오성, 2번의 천민자본주의 속성, 3번의 폐쇄성과 기성세력화됨을 비판하는 예술. 19세기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경제적으로는 산업기술이 발전하면서 2번 경향, 즉 예술적 기교들을 상품판매에 동원하려는 경향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하지만 아직 오늘날의 디자인 산업 정도로 대규모가 되진 않고, 예술이 판화 인쇄물이나 상표 등에만 간간히 사용되던 수준이었다. [[이스트만 코닥]] 정도 되어야 현대적인 의미의 광고가 나오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64px-Brooklyn_Museum_-_Nadar_%C3%89levant_la_Photographie_%C3%A0_la_Hauteur_de_l%27Art_-_Honor%C3%A9_Daumier.jpg]] 도미에, <사진을 예술로 높인 나다르ㆍNadar Elevating Photography to the Level of Art>, 1862.[* 나다르는 자신의 사진관에서 1874년 제 1회 인상파 전람회를 개최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이미 1858년에 기구ㆍ氣球를 타고 세계 최초로 공중 촬영을 시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사진술의 발 명으로 인한 화가들의 충격은 매우 커서 "회화는 죽었다!"고 단언할 정도였으나, 추상회화와 같은 신개념의 미술을 산출하는 기폭제 역할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도미에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 문인들, 미인들의 기념사진을 찍어 초상사진의 고전적인 이미지를 정착해 주었다. (Judith Wechsler, Ibid., p. 20, 박홍규, Ibid., pp. 212~217) [[http://www.komacon.kr/dmk/manhwazine/zine_view.asp?cateNum=414_6&Tag=&seq=365&nowPage=1&srh_fld=&srh_txt=|원출처]] ] 그리고 이 시기에 드디어 사진이 발명되었고, 19세기 중엽이 되면 파리 곳곳에 사진관들이 성업하게 된다. 도미에가 그린 삽화를 보면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초기 사진 시기에는 사진 성능이 형편없어 3류 화가들이 일일이 현상액을 붓으로 수정해주고 색을 입히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후 사진기술이 발전한 뒤에는 당연히 기존 초상화가들은 밥벌이에 위협을 받게 되었다. [[http://art.findartinfo.com/images/artwork/2006/8/a000917374-001.jpg]] [[http://art.findartinfo.com/art.asp?i=71&p=19&old=1|앙드레 아돌프-으제느 디스데리(Andre Adolphe-Eugene Disderi)가 특허를 낸 명함판 사진(Carte-de-Vistite)의 예.]]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프랑스 혁명 등이 일어나 왕족, 귀족 세력이 몰락하였지만, 아직 신진 세력인 [[부르주아]]들은 자기 취향 줏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시기다. 따라서 부르주아들은 1번 예술을 어레인지하는 수준에서 문화 생활을 했다. 실제로 19세기 중반 당시 초상사진들을 보면, 자기들이 무슨 귀족이나 그리스 신들인 마냥 코스프레하고 찍은 사진들이 많다.(위의 사진은 약과다) 이외에도 속은 철골 구조면서 겉은 그리스 로마 건축을 흉내낸 대규모 오페라관을 짓거나, 살롱에서 과거 아카데미즘(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회화를 놓고 품평하며 사교모임하던 시절이라는 것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54px-Musei_Wormiani_Historia.jpg]] 경이로운 방의 한 예. <"Musei Wormiani Historia", the frontispiece from the Museum Wormianum depicting Ole Worm's cabinet of curiosities.> 그 이외에 눈에 띄는 점이라면, 1759년 [[대영박물관]]이 대중에게 공개되고, 1793년 프랑스 혁명정부가 루브르궁 대전시장에 국립중앙미술관을 설치하고 대중에게 공개했다는 것 정도. 그 이전까지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건 그저 '귀족들의 골동품 창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을 뿐이다. 경이로운 방(Cabinet of curiosities)이라 불린 이 창고는 귀족들이 진기한 미술품들을 모아놓고 다른 귀족들에게 자랑하는 공간이었을 뿐이었다.[* 박제, 화석, 민속품, 식물, 동물, 유물, 미술품 등 종류는 다양. 이후 자연사박물관, 박물관, 미술관, 식물원, 동물원 등은 다 이 귀족들의 전시관에서 유래된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아는 권위적이고 가까이 하기 힘든 미술관은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후 현대미술관은 전시물들을 저렇게 다닥다닥 붙여놓진 않게 되었지만, 아직도 루브르 미술관 같은 19세기 이전 작품을 주로 전시하는 미술관은 저런식으로 다닥다닥 디스플레이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당연히 당시 이런 곳에 드나든 관객들은 부르주아들이 대부분. 오늘날 서민층에 해당하는 (그리고 오늘날엔 대중문화의 주요 고객들인) 당시 노동자 계층은 정말 심심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유일한 낙은 '빵과 서커스'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러니 당연히 미술관 운영이나 소장, 전시하는 작품도 부르주아 취향에 맞춰서 전시 될 뿐이었다. 근데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당시 부르주아들은 자기만의 취향 줏대가 없어, 미술작품도 그냥 이전 귀족들의 취향을 그대로 받아서 흉내내는 정도에 그쳤다. 다시 말해, 이전 관학파(아카데미즘) 예술이 그냥 머물러 있는 수준이었다는 것. 이들 기존 아카데미즘이 자리를 꽉 잡고 있는 상황에서, 신세대 화가들은 정말 그림 기교가 뛰어나지 않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점차 이 당시 신세대들은 자기들이 이전 세대와 다르다는걸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4번 예술을 만들려 시도했다. 그렇게 나온 예술이 아래에서 설명할 리얼리즘이나 인상주의인 것이다. 하지만 이 예술들은 우리가 사는 오늘날에는 더 이상 4번 위치에 있는 예술이 아니게 되었다. 도리어 3번 예술의 위치에 가있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