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사드 (문단 편집) === 암살 === 모사드는 암살에 대해 가능한 한 [[NCND|긍정도 하지 않고 부정도 하지 않는다.]] * 나치 전범을 추적해 암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 알렉산데르 라크(Aleksander Laak): [[에스토니아]] 출신 나치 부역자로 나치 수용소 중 하나인 예갈라 강제 수용소(Jägala concentration camp)의 책임자였다. 최소 10,000여명을 수용소에서 죽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전후 [[캐나다]]로 도피했다. [[1960년]] [[위니펙]]의 자택 차고에서 목을 매단 채 발견된다. 그는 안 그래도 평소에 자신과 같은 에스토니아인 부역자들이 전후에 족족 체포되어 처벌받는 것을 보고 심적으로 불안해했다고 한다. 이스라엘 저널리스트 마이클 엘킨스(Michael Elkins)에 따르면 사망하기 전날 아내가 영화를 보러 나간 사이 집에 모사드 요원들이 침입해 그에게 [[자살]]을 강요했다고 한다. 안 그래도 심적으로 몰려있었던 라크는 살해당하는 것보다는 자살하는 것을 택하고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는 것. * [[구스타프 바그너]]: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소장으로 [[브라질]]에 숨어 살다가 1978년 [[시몬 비젠탈]] 센터에 발각되어 한 번 체포되었다. 그러나 브라질 정부가 이스라엘, 폴란드, 오스트리아의 인도를 모두 거절함으로써 잔류할 수 있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1980년 자택에서 가슴에 칼이 꽂힌 채 발견된다. 가슴에 칼을 꽂아 죽이는 것이 당시 유태인들의 나치 전범 및 부역자들에 대한 주된 복수 방법이라는 것에서 모사드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있다. * 주변 국가의 핵무기 개발에 관여된 사람들을 암살했다. * 야하 엘 메스하드(Yahya El Meshad) 암살 (1980): 이집트 출신 핵물리학자. 이집트의 핵 개발 프로그램이 동결된 후 이라크로 옮겨 프랑스의 도움을 받은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이라크의 핵 개발 프로그램]]을 이끌다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방에서 살해되었다. * [[제럴드 불]] (1990.3.22): 캐나다인 대포 개발자로 이라크에 협력하다가 총격으로 암살당했다. 암살 전부터 누군가 [[미행]]하는 것 같다든지 집에 돌아와보면 가구 배치가 바뀌어 있다든지 등의 반응으로 박사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이것을 모사드의 경고로 해석하기도 한다. 문서 참조. * 무하마드 슐레이만 암살 (2008.8.1): [[시리아군]] 준장. 시리아 바시르 알 아사드 정권에서 대통령 군사보좌관, 북한과의 핵 프로그램 협력 연락 담당자, 핵시설 보안 책임자로 있었다. 시리아 연안 도시의 휴양지에서 삼엄한 경호 속에 저녁 파티를 즐기던 중, 별장 앞바다에 잠수해 대기하던 암살자가 발사한 총탄에 맞아 즉사했다. 경호원들은 아무도 총성을 듣지 못 했다. 모사드와 이스라엘 해군 특수부대 '제13전단'의 공동작전으로 추정된다. * 2012년 이란의 핵개발 관련 과학자 4명이 연속으로 암살당했다. [[http://imgnews.naver.com/image/028/2012/01/12/132637010700_20120113.JPG|참고]] 반이란 단체 및 망명 단체들이 모사드에 협조하는 것도 많다고 한다. 과거 팔레비 왕조 시절 비밀경찰 샤바크가 모사드와 동맹으로 서로 정보를 주고 받았는데 호메이니 정부에게 샤바크는 철저하게 숙청당했고 일부 샤바크 관계자는 해외로 이민가서 지금까지도 반이란 활동에 나서고 있기에 이들이 모사드와 은밀히 협력했다는 주장도 많다. * 모센 파크리자데 (2020): 이란의 핵 과학자이자 아마드 프로젝트의 총책임자 센 파크리자데를 암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특히 원격조종기관총이 테러에 동원되었고 테러 직후 이 원격조종기관총 탑재 차량이 곧바로 자폭 처리되었다던가 테러 직전 외부 통신선 까지 차단한 사례들이 모사드로 확실시 되는 분위기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214/0001083078?sid=104|#]] * 사이드 호아에이 (2022): [[이란 혁명 수비대]] 쿠드스군의 대령으로 테헤란에서 운전중 괴한에 의해 총격에 맞아 사망했다 * 와사르 즈와이테르, 마흐무드 함샤리, 후세인 알 바시르 등 아래에 서술하는 [[뮌헨 올림픽 참사]](1972)에 대한 보복 암살 작전을 벌였다. 검은 9월단에 의한 [[1972 뮌헨 올림픽|뮌헨 올림픽]] 테러가 발생하자 모사드는 검은 9월단 일원 13명을 9년동안 추적하여 암살하였다. 영화 '[[뮌헨(영화)|뮌헨]]' 이 이 '신의 분노 작전'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 와사르 즈와이테르(Wael Zwaiter) 암살 (1972.10.16): 이탈리아 로마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으로, 아라파트의 조카이기도 하다. 직업은 [[번역가]]이고, 저녁 먹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모사드 요원들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 즈와이테르의 지지자는 '검은 9월단과 관계없는 죄없는 지식인을 암살'했다고 비난하지만,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사령관이라고 주장한다. * 마흐무드 함샤리 암살 (1972.12): PLO의 프랑스 대표. 파리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모사드 요원이 이탈리아 언론인으로 위장해 아파트 내에 폭파팀이 잠입할 수 있게 함샤리를 속였다. 전화기가 있는 책상 밑에 폭탄을 설치한 후 함샤리에게 전화를 걸어 함샤리가 전화를 받는 걸 확인하자마자 [[부비트랩]] 폭탄을 터뜨렸다. 함샤리는 치명상을 입은 뒤 프랑스 경찰에게 사건의 전모에 대해 진술했고 몇 주 후 사망했다.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프랑스 총책이라고 주장한다. * 후세인 알 바시르 암살 (1973.1.24): 요르단인. 키프로스의 파타흐 (Fatah) 당 대표. 호텔 방에 들어와서 불을 끄자 원격 폭탄이 폭발해서 폭사했다.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키프로스 총책이라고 주장한다. * 바시르 알 쿠바이시 암살 (1973.4.6):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의 법학 교수. 파리에서 저녁 먹고 집에 가던 중 2명의 모사드 요원에게 12발의 총격을 맞고 사망했다.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무기를 운송했다고 주장한다. * 모하메드 유스프 알 나자르, 카말 아드완, 카말 나세르 암살 (1973.4.9): 모하메드 유스프 알 나자르는 검은 9월단의 작전대장, 카말 아드완은 PLO의 작전대장, 카말 나세르는 PLO 최고위원회 위원이자 대변인.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쉽사리 암살할 수 없었다. 'Spring of Youth' 작전을 통해 특공대를 보내 대규모 습격을 벌여 살해했다. 특공대는 민간인 복장을 하고 이스라엘 해군의 미사일 고속정에서 내린 조디악 모터보트를 통해 레바논 해안에 상륙했다. 모사드 요원들이 차를 렌트해서 특공대를 운송했다. 나자르의 부인, 이탈리아 민간인, 레바논 경찰 2명이 습격에 휘말려 함께 사망했다. * 자이아드 무차시 암살 (1973.4.11): 키프로스에서 후세인 알 바시르의 후임자. 호텔 방에서 침대 밑의 폭탄으로 인해 폭사했다. * 아브델 하미드 시비, 아브델 하디 나카 암살 (1973): 로마에서 차량 폭탄으로 인해 치명상을 입었다. * 모하메드 부디아 암살 (1973.6.28): 알제리 출신. 프랑스의 검은 9월단 작전대장. 변장과 [[여장]]에 능했다. 카시트 밑에 너트와 볼트를 이용한 압력식 폭탄에 의해 사망했다. * 알리 하산 살라메 암살 (1979): 검은 9월단의 지도자 중 1명인 알리 하산 살라메는 1973년 7월에 모사드의 암살을 간신히 피했다. 그 이후 CIA의 보호를 받아 모사드의 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1973년 11월 3일 CIA 부국장 '버넌 월터스'는 수단 주재 미국대사 암살 이후 [[아라파트]]를 만나 'PLO가 미국인에 대해 테러를 하지 않는다'라는 비밀 약속을 했다. PLO는 중동지역 테러 정보를 CIA에 제공해서 미국인들이 좀 더 안전하게 중동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아라파트는 CIA와의 연락책으로 알리 하산 살라메를 지명했고, 그는 미국 CIA 본부 건물에 초청받아 드나들었다. 모사드는 CIA에게 알리 하산 살라메와의 연락을 끊으라고 요구했으나 CIA는 정보적 가치가 높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알리 하산 살라메는 결국 1979년 베이루트에서 폭탄으로 모사드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모사드의 책임자는 '라피 에이탄'으로, 전설적인 공작 책임자였다고 한다. 레바논 민간인 8명이 주변에서 함께 사망했다. 모사드와 CIA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 아브 다우드 암살 (1981.8.1): 검은 9월단의 수장이며 [[PLO]]의 유력한 지도자. 바르샤바에서 저격당했다. 당시에는 모사드의 관여 '''설'''만 나돌았지만, 결국엔 모사드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 공산 독재국가에 총기를 밀반입해서 암살을 성공시킨 것이니 평범한 암살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 이런저런 팔레스타인 지도자 암살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 칼릴 왈 아지르 (1988): PLO 군사지도자. '아부 지하드' (성전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핵심 인물. 튀니지에서 집에 있다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총격으로 살해당했다. 30명의 암살자가 작은 보트에 타고 튀니지 해안을 통해 침투했다. 일부는 관광객으로 가장해 알 와지르의 집을 포위했고, 일부는 튀니지군 군복을 입고 거리를 봉쇄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보잉 707 [[전자전]]기를 띄워 모든 통신을 방해했다. 이 작전은 모사드가 실행한 암살 작전 중에서도 대규모인 것으로 평가된다. * 파트히 샤카키 (1995):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이슬람 지하드' 간부. 몰타에서 암살당했다. 암살자들은 두 달 전 현지에서 오토바이를 훔친 뒤 그 오토바이를 타고 샤카키의 머리에 3발의 총격을 가했다. * 야햐 아이야시 (1996): 하마스의 폭탄 제조자. 가자지구에서 휴대폰을 사용하다가 전화에 장치된 부비트랩에 의해 사망. 당시 그의 먼 친척을 자칭하는 19살 청년이 아이야시의 집을 방문한 뒤 집에 전화하겠다며 휴대폰을 빌렸는데 이 때 폭탄을 심은 것으로 알려졌다. 모사드가 휴대폰 폭탄을 사용한 최초의 암살이었다. *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 (2004): 하마스의 창시자이자 간부. 과거에 이스라엘이 체포해서 투옥시켰다가 1997년 칼리드 마샬 암살 실패 당시 협상에 의해 석방하였다. 그러나 2004년 이스라엘에 의해 헬리콥터 미사일 공습으로 암살당했다. * 엘 딘 셰이크 칼릴 (2004.9.26.): 하마스 소속. 가자 지구 등에서 발생한 폭탄테러의 배후 인물로 지목을 받아왔다.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SUV 승용차에 시동을 걸자 폭탄이 터져 사망했다. * 이마드 무그니예 (2008.2.12.): 1983년 베이루트 주둔 미 해병대에 대한 테러 공격 및 외국인 납치 혐의로 미국 정부에 의해 50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리고 25년간 추적당했다. 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이란 이슬람 혁명 29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했다가 주차장에 세워놓은 자신의 SUV ([[파제로]])에 탑승했는데 운전석 쿠션에 설치된 폭탄이 터져 사망했다. * 마무드 마부 (2010): 하마스 지도자. 두바이의 한 호텔에 투숙하고 있을 때 호텔 객실에 침입해 베개로 질식사시켰다. 하단 문단 참조. * 암살에 실패한 적도 있다. * 알리 하산 살라메 암살 실패 (1973.7): 모사드는 노르웨이의 릴레함메르[* 인구 27,000여명의 소도시.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1994년 동계올림픽]]의 개최지이기도 했다. ]에서 모로코인 웨이터 '아흐메드 부치키'를 검은 9월단의 지도자 중 하나인 알리 하산 살라메로 착각해서 살해했다. 알리 하산 살라메는 그 도시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숨어 지내고 있었다가 모사드의 암살 시도를 간신히 모면했다. 모사드 요원들은 아흐메드 부치키를 임신한 노르웨이인 아내가 보는 앞에서 총으로 쏘아 죽였다. 살해한 요원 중 6명(남성 4 여성 2)이 작전에 사용했던 자동차를 버리지 않고 그 차로 공항으로 가다가 노르웨이 당국에 살인죄로 체포당했다. 이 사건에서 체포당한 요원들이 활동내용을 자백하는 바람에 모사드의 유럽 내 활동에 큰 타격을 입었다. 모사드가 힘을 써서 2년만에 전부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유럽 내 [[안전가옥]]을 비롯한 비밀공작 인프라를 거의 상실했고, 유럽 내 활동은 이후 몇 년간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리고 여성 요원 중 '실비아 라파엘'은 자신을 담당하던 현지 변호사와 사랑에 빠져 출옥 후 결혼했고, 1992년 남편의 출생지인 남아공으로 이주해버렸다. 이 사건은 이라크로부터 당시 최신형 소련제 미그기를 탈취하는 작전 이래로 그간 비교적 승승장구하며 꽤 주목할 만한 첩보계의 플레이어로 주목받던 모사드에 타격을 준, 이른바 '''릴레함메르의 실패'''라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작전목표 달성 실패는 물론 이 때문에 유럽 내 공작망이 붕괴되어 다시 재구축할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이후 모사드의 요원 훈련 교범 및 코스에서 주 교훈으로 삼는 실패 사례가 되었다고. 1996년 이스라엘 정부는 사죄하며 유족에게 배상금을 지불했다. 비록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알리 하산 살라메는 결국 이 사건 6년 후인 1979년에 폭탄으로 암살당했다. * [[알로이스 브루너]]: 나치 전범으로 시리아 정부의 국빈으로 보호받으며 첩보 교육을 했다. 모사드에서 1961년, 1980년 두 번 폭탄 편지를 보냈지만 목숨에 지장이 없었고 한 눈과 손가락 1개를 잃는 데 그쳤다. 2010년 시리아에서 98세로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다. * 칼리드 마샬 암살 실패 (1997.9.25.): 하마스의 간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지시하여 캐나다 여권을 소지하고 요르단으로 여러 명의 요원이 입국해 칼리드 마샬의 귀에 독극물을 주입했다. 경호원이 암살단 중 2명을 현장에서 붙잡았다. 요르단 국왕이 격분해 '이스라엘이 해독제를 넘겨주고 요르단과 3년간의 평화협정을 맺어야 요원들을 풀어주겠다'라고 조건을 제시했다. 캐나다가 여권을 도용당해 항의를 했고,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당시 중동 평화 협상을 이끌던 중이라 모사드에 불만을 표했기 때문에 모사드는 해독제를 보내주었으며 투옥중이었던 하마스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을 포함해 하마스 조직원 22명을 석방했다. 칼리드 마샬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하마스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요르단 역시 모사드 요원 2명을 풀어주었다. 당시 모사드의 최고책임자였던 다니 야톰 국장[* 이 양반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에게 직접 뽑혀서 국장으로 취임했는데 이때의 작전 실패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뿐만 아니라 모든 언론의 비난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나몰라라 했고. 결국 다니 야톰 국장은 얼마 안돼서 스위스에서의 공작 활동 실패로 인해 자신이 책임을 떠 맡고 사퇴했다.]은 욕을 엄청나게 먹어야 했다. 다만, 이 때 풀려난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은 2004년 공습으로 암살당했다. * 하산 나스랄라 (2006): '''암살을 유일하게 피한 인물.''' 레바논의 반이스라엘 무장단체인 헤즈볼라의 대표로 2006년 헤즈볼라와의 전쟁 중 그의 집을 미리 알아내 급습했지만 나스랄라가 이미 눈치채고 도망가서 암살에 실패하였다. 당연히 현재 모사드 암살 0순위로 공식적인 신분노출은 헤즈볼라의 프로파간다 방송 알-마너로만 신분을 드러내고 있다. * '''모하메드 알 데이프''': '''하산 나스랄라가 카피면 데이프는 원TOP''' 그의 사진으로 찍힌것도 20년전이었으며[* 다에시 포함 다른 무장단체들은 사진을 대놓고 찍히거나 예방 접종을 받은 반면, 데이프는 그 이상으로 치밀한 편이다.] 공습 9번에 직접 타격에도 살아남아서 '사기를 올리기 위한 가상인물 혹은 죽을 위기를 매번 넘기는 전설적 인물' 평가할 정도였다. 데이프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은 공습에 몰살되었지만 아들인 데이프는 그 자리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