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타운 (문단 편집) == 역사 == 50년대부터 알앤비 밴드에서 활동하던 [[베리 골디]]는 [[재즈]] 음반을 주로 취급하는 레코드 가게를 열지만, 금세 빚만 남기고 사업을 접어야 했다. 부채 상환을 위해 디트로이트의 [[제너럴 모터스]]의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며 작곡 활동을 병행하던 그는 58년 알앤비 가수 [[재키 윌슨]]에게 "[[Lonely Teardrops]]"라는 [[로큰롤]] 곡을 제공하게 되는데 이 곡이 1958년 밀리언셀러를 기록, 그의 음악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뜻을 굳힌 그는 백인들에게 장사가 되는 알앤비를 시도해 보자는 생각으로 단돈 8백 달러로 레코드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이 돈은 자신의 동네 친구이자 훗날 모타운의 첫 스타 그룹이었던 Miracles의 리더 [[스모키 로빈슨]]이 빌려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회사명을 모타운이라 명명하게 되는데, 모타운이란 모터 타운 즉,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인 디트로이트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초기에는 Motown과 Tamla 두 개의 조그마한 산하 레이블을 운영했지만, 1959년부터 회사의 첫 아티스트로 있다가 1961년 "[[Shop Around]]"로 전국적인 히트를 거두며 모타운 시대의 시작을 알린 [[스모키 로빈슨]] 앤 더 미라클스와 [[Money (That's What I Want)]]로 모타운 최초 히트곡을 거둔 바렛 스트롱, 뒤이은 [[메리 웰스]],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마샤 리브스 앤 더 벤델라스, [[슈프림즈]], [[템테이션스]], [[The Four Tops|포 탑스]] 등의 대박 행진으로 점차 대형 레이블로 성장해 간다. 소규모의 인디펜던트 레이블을 단 십 년 만에 명실 공히 대기업의 위치로 이끈 베리 고디의 탁월한 사업 수완은 히츠빌리 USA라 불리던 레이블 사옥의 효과적인 운용에서 잘 드러난다. 그곳은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구조였다. 1층에는 작곡가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며, 2층엔 펑크 브라더스라 명명된 백업 밴드가, 3층엔 안무가들이, 그리고 지하엔 레코딩 스튜디오와 휴게실이 있었다. 소속 가수들은 각 층을 오가며 하드 트레이닝을 했으며, 연주가와 작곡가들은 대량으로 악곡을 생산, 그것을 가장 잘 소화하는 가수에게 주는 식이었다. 따라서 모타운 레이블의 곡들은 가수가 다른 동일 곡이 여럿 존재한다. 모타운 사운드는 "The Sound of Young America"라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것으로서, '최대한 넓은 수용층'을 겨냥한 '양질의' 상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가수들은 사장의 방침에 따라, 기품 있는 의상을 입고 우아하게 행동해야 했으며(정확히 말해 백인 관점에서의 흑인다운 행동은 일체 금지였다), 에드 설리번 쇼 등 많은 TV 음악 프로그램에 활발하게 출연, 레이블 전반적으로 동시대의 [[비틀즈]]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었고, 대중음악의 흐름을 선도했다. [* 당시 [[브리티시 인베이전]]에 점령당하고 있던 미국 음악계의 자존심을 세워 준 게 바로 모타운이다. 1964년 미국 음악계가 비틀즈에 의해 완전 침공당했던 시절 비틀즈의 유일한 대항마는 [[슈프림즈]]였다. 1964년 초중반 비틀즈의 1위 행진 및 차트 완전 정복을 슈프림즈가 막으면서 (그러니까 슈프림즈의 1위로 비틀즈의 1위가 저지되었다.) 슈프림즈는 미국 음악의 자존심을 되살려 줬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실제로 1960년대 비틀즈가 빌보드 1위곡을 20개 기록하는 동안 슈프림즈 역시 12개나 기록했다. 전성기 역시 비틀즈는 (1964~1970년) 슈프림즈 (1964~1970년)으로 같다! 참고로 빌보드 1위곡이 10개가 넘는 아티스트는 단 10명밖에 되지 않는다. 20개의 [[비틀즈]], 19개의 [[머라이어 캐리]], 18개의 [[엘비스 프레슬리]], 14개의 [[리아나]], 13개의 [[마이클 잭슨]], 12개의 [[마돈나]]와 [[슈프림즈]], 11개의 [[휘트니 휴스턴]], 10개의 [[자넷 잭슨]]과 [[스티비 원더]]이다.] 모타운 사운드의 음악적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작곡 트리오 [[:분류:홀랜드-도지어-홀랜드|H-D-H]]와 연주자 집단 펑크 브라더스는 1965년에서 1972년 사이에 모타운 레이블에서 발표된 빌보드 탑 텐 히트곡 79곡 중 28곡을 썼다. 또한 넘버원에 랭크된 21곡 중 무려 12곡이 바로 그들의 작품이었다. H-D-H란 홀랜드, 다져, 홀랜드의 약자로 에디 홀랜드 브라이언 홀랜드의 홀랜드 형제와 라몬트 도지어 등 세 명의 멤버로 구성된 작곡가 팀이었다. 그중 에디 홀랜드가 작사를, 브라이언 홀랜드가 작곡을 주로 담당하고, 라몬트 도지어가 작사, 작곡, 양쪽에 모두 참가하는 형태로 곡을 완성했다. 이 세 명이 한 팀을 이루어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2년경의 일이었고, 바로 그 무렵부터 디트로이트의 작은 레이블에 불과했던 모타운은 기적의 대약진을 시작했다. 재즈에 일가견이 있던 피아니스트 알 반 다이크, 수많은 명 프레이즈를 만들어 낸 베이시스트 제임스 재머슨, 그리고 모타운 사운드 특유의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낸(모타운 비트 라고도 한다. 슈프림스의 〈[[You Can't Hurry Love]]〉가 대표적) 베니 벤자민, 〈[[My Girl(템테이션스)|My Girl]]〉의 저 유명한 기타 리프를 완성시킨 기타리스트 로버트 화이트를 중심으로 한 펑크 브라더스는 H-D-H가 가져온 노래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양념을 치며 1일 3곡이라는 엄청난 스피드로 무수한 히트를 쳤다. 펑크 브라더스는 히트곡 제조 공장의 생산 라인에서 가장 숙련된 근로자였고, 그들의 부재는 생산 라인의 마비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모타운의 해외 공연 등에 동참하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으며, 언제나 녹음을 위해 컴컴한 스튜디오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그들에 대한 댓가는 몇 푼 안 되는 시급이 전부였다. 게다가 모타운이 로스앤젤레스로 본거지를 옮기며 그들은 결국 활동의 장마저도 빼앗겨 버리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모타운의 설립자 베리 골디의 1인 독재 체제하에서 H-D-H에게 주어진 보상 역시 그들의 공로에 비하면 한없이 미미한 것이었다. 과도한 업무와 부당한 대우에 화가 날대로 난 H-D-H는 1968년 10만 달러의 보너스를 주겠다는 회유에도 불구, 모타운의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모타운으로부터 독립한 그들은 곧장 자신들의 레이블을 설립한다. 그것은 인빅터스와 핫 왁스라는 두 개의 레이블로써, 거기에서 곧장 자신들의 작품을 제작, 캐피틀 레코드와 붓다 레코드를 통해 발매하기에 이른다. 그들이 그렇게 자신들의 레이블을 세우는 동안, 모타운에서는 본사를 디트로이트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한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H-D-H라는 기둥을 잃은 모타운은 자신의 뿌리인 동시에 정체성이기도 했던 지역의 흑인 커뮤니티와도 완전히 결별하며 느닷없는 노선 변경을 감행한 것이다. 1972년 로스앤젤레스로 본거지를 옮긴 모타운은 예전의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잭슨 파이브, 다이애나 로스, 스티비 원더, 마빈 게이 같은 간판급 스타들은 여전히 레이블에 남아 있었지만[* 잭슨 파이브는 1976년, 다이애나 로스는 1981년, 마빈 게이는 1982년에 모타운을 떠났다. 스티비 원더는 2000년대까지도 모타운에 머물러 있었다.] [[:분류:케네스 갬블-리온 허프|갬블 앤 허프]]가 설립한 필라델피아 인터내셔널 레코드라는 경쟁자가 나타났고 [[알 그린]], [[로버타 플랙]]과 같은 새로운 [[소울 음악]] 스타들과, [[아이즐리 브라더스]], [[War(밴드)|War]] 등 [[펑크(음악)|Funk]] 밴드들이 전성기를 맞게 되어 씬에 변화가 일어났고, 레이블의 최전성기였던 1960년대에 비해 미국 대중음악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나마 기존의 모타운 소속 스타들이 1970년대 중후반에 커리어적으로 최전성기를 맞게 되면서 회사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다이애나 로스는 1973년부터 1980년까지 [[Touch Me in the Morning]], [[Love Hangover]], [[Theme from Mahogany (Do You Know Where You're Going To)]], [[Upside Down]] 등의 대히트곡들을 발매했고 스티비 원더는 [[Talking Book]], [[Innervisions]], [[Songs in the Key of Life]] 등 상업적으로, 평론적으로 모두 성공을 거둔 앨범들과 수많은 히트곡들을 만들었다. 특히 Songs in the Key of Life는 빌보드 200에서 14주 비연속 1위, 1977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 2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마빈 게이 역시 [[Let's Get It On]]으로 1973년에, [[Got to Give It Up]]으로 1977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템테이션스]], 에디 켄드릭스, [[코모도스]], 셀마 휴스턴 등의 소속 아티스트들도 히트곡들을 내놓았다. 1980년대가 되자 지독한 경영난에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이따금 [[코모도스]]나 드바지, [[라이오넬 리치]], [[릭 제임스]] 같은 재능 있는 신예들과 [[스모키 로빈슨]], 스티비 원더와 같은 기존 모타운 스타들이 레이블을 위기에서 구하는 듯했으나 결국 거기까지였다. 80년대에 접어들자 음악 산업은 점점 다국적 기업에[* 소니, 유니버셜 등.] 의해 주도되기 시작하며 경영은 날로 어려워져 갔다. 1988년 모타운은 결국 소규모 독립 레이블의 처지로 MCA에 매각되어 버리고 만다. MCA에 매각된 이후에도 모타운의 이름 자체는 유지되었는데, 매각 이후의 모타운을 대표하는 아티스트가 바로 [[보이즈 투 멘]]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