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목종(당) (문단 편집) == 《자치통감》기록 == 중국 역사상 '''제2차 환관시대'''(820년 1월~903년 1월)가 시작되었다. 헌종이 급사(820年 1月 27日)한 후, 26세의 목종이 즉위했다.(윤1月 3日) 호부시랑 황보박이 좌천되었다.(윤1月 4日) 영남도의 옹관(邕管)경략을 철폐하고, 용관(容管)경략에 예속시켰다(2月 20日). 토번이 관내도의 영(靈)주 영무(靈武)를 약탈하고(2月), 염(鹽)주를 약탈했다.(3月) 성덕(成德)절도사 왕승종이 사망하자, 그 무리들이 동생인 왕승원을 성덕유후로 세웠다.(10月 11日) 토번과 탕구트(당항)가 관내도의 경(涇)주를 약탈하고, 철수했다.(10月 17日) 또한 염(鹽)주, 검남도 아(雅)주를 약탈하고(10月 22日), 염주의 오(烏)와 백지(白池)를 포위했다.(12月 1日) 관내도의 염(鹽)주는 4개의 염지(鹽池)를 관할했는데, 백지(白池), 오지(烏池), 와지(瓦池), 세항지(細項池)였다. 성덕유후 왕승원이 무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성절도사로 옮겼다.(11月 9日) 58년만에 성덕(成德)군이 귀부했다. 영남도의 용관(容管)경략이 만족인 황소경을 격파하고, 영책 36곳을 공파했다고 보고했다.(12月 15日) 만족 출신인 황소경의 반란은 794년부터 계속 진행 중이었다. 하북도의 번진에서, 드디어 조세를 보내왔다.(821年 1月 4日) 노룡절도사 유총이 두려워하며 절도사직을 내놓고, 승려가 되기 위해 떠났다가 급사했다.(3月 27日) 58년 만에 노룡(盧龍)군이 귀부하여 번진(藩鎮)이 재통합되었다. 한림학사 이덕유와 중서사인 이종민이 각기 붕당을 만들어 대립했다.(4月 11日) 이로써 당나라를 쇠락하게 만든 '''우이당쟁'''[* 牛李党争. 821~846]이 시작되었다. 각차(榷茶. 차 세금)의 세액을 100전마다 50씩 인상했다.(5月 17日). 위구르(회골)의 숭덕가한과 혼인관계를 맺었다.(6月 7日) 노룡절도사에 장홍정이 임명되고, 영(瀛)·막(莫) 두 주를 떼어 관찰사를 설치했다.(821년 6月) 노룡(盧龍)군 병사들이 절도사 장홍정의 억압에 반항해 반란을 일으켰다.(821년 7月 10日) 주극융이 노룡유후로 세워졌다.(821년 7月 11日) 성덕(成德)군의 도지병마사 왕정주가 절도사 장홍정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성덕유후를 칭했다.(821년 7月 28日) 노룡군의 주극융이 막(莫)주(8月 9日)·영(瀛)주(13日)를 장악했으며, 성덕군의 왕정주가 기(冀)주를 장악하고(8月 10日), 심(深)주를 포위했다.(13日) 위박·횡해·소의·하동·의무군에 명령을 내려, 성덕군의 왕정주를 토벌하도록 했다.(8月 14日) 배도를 유진양도초무사로 삼아 총괄케했다.(26日) 하북도의 상(相)주에서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9月 12日). 노룡군의 주극융이 역(易)주, 래수(淶水), 수성(遂城), 만성(滿城. 영락)을 약탈했다.(9月 19日) 전(錢)을 주조하는 로(爐)의 경우, 현종 개원 연간에 70여개 로에서 매년 100만전을 주조했는데 현종 천보 연간에 99개로 증가했고, 목종 치세에는 10여개 로에서 매년 15만전이 주조되었다. 덕종때 양세법이 시행된 이후, '전'의 가치가 갈수록 높아져, 백성들의 조세가 조용조 때보다 3배를 더내는 형국이 되었다. '양세'는 모두 포(布)·사(絲)·광(纊. 솜)으로 내게 하고, 소금·술은 계속 전으로 내게 했다.(9月) 유원정을 파견하여, 토번의 논눌라와 맹약을 맺도록 했다.(10月 10日) 배도가 하동도 태원부 승천군(承天軍)의 옛 관문(故關)에서 진격했다.(10月 14日). 노룡군의 주극융이 하동도의 울(蔚)주를 약탈했다. 성덕군의 왕정주가 하북도의 패(貝)주를 약탈했다.(10月 15日). 역(易)주자사 유공제가 백석령(白石嶺)에서 노룡군을 격파했다.(16日) 횡해절도사 오중윤이 심주 요양(饒陽)에서 성덕군을 격파한 것을 보고했고,(17日) 위박절도사 전포가 기주 남궁(南宮)의 2개 목책을 공파했다.(18日) 영무(삭방)절도사 이진성이 하투 남쪽 대석(大石)산에서 토번의 기병 3,000기를 격파한 것을 보고했다.(10月) 치청(평로)절도사 설평이 돌격대장 마정음의 반란을 평정했다.(11月 28日) 횡해절도사 두숙량이 영주 박야(博野)에서, 성덕군에게 대패했다.(12月 8日). 의무절도사 진초가 정주 망도(望都) 및 북평(北平)에서 노룡군을 격파했다.(15日) 목종이 주극융을 노룡절도사에 제수했다.(12月 23日) 의무절도사 진초가 막주 청원(淸源)의 3개 목책을 공파한 것을 보고했다.(12月 26日) 노룡군이 경(景)주의 궁고(弓高)를 공파했다.(822年 1月 5日) 이로서 포위된 심(深)주로의 보급로가 차단되었고, 기주의 하박(下博)이 포위되었다. 노룡군과 성덕군의 반란 진압에 17~18만명의 대군이 동원되었다. 1개군의 1개월 비용이 28만민이었다. 백거이의 문집에는 병력수가 70~80만명이었다고 했다.[* 호삼성은 이것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 창(滄)주에서 포위된 심(深)주로 보낸 군량 600승이 기주 하박(下博)에서 성덕군에 약탈당했다.(1月 7日) 위급한 군으로 보내지는 군수물자가, 도중에 다른 군에게 약탈되었다. 위박절도사 전포가 기주 남궁(南宮)에서, 교만·방자한 장사들과 아장들에 의해 옹립된 사헌성에 의해 쫒겨나(1月 8日) 위(魏)주로 돌아왔다.(1月 10日) 전포는 제장들이 재출병을 거부하자 자결했다.(1月 11日). 사헌성이 위박유후를 칭하자, 위박절도사를 제수했다.(1月 17日) 그는 노룡군 및 성덕군과 내통했다. 목종은 심주가 함락되려하자, 왕정주를 성덕절도사에 제수했다. 이로써 '''하삭(河朔. 河北) 3진이 완전히 자립했다.'''(822年 2月 2日) 목종 즉위초에, 번진들의 병력을 줄이려고, 매년 8%의 병사들을 일부러 병적에서 말소시켰다. 말소된 병사들은 도적이 되었다, 노룡군 및 성덕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모두 합세했다. 여러 군은 이미 병력 감소때문에 임시로 불러모아 까마귀떼와 같았다 환관인 중사(中使)들이 진지(陳地)를 감독하여, 주장들이 제대로 지휘할 수 없었다. >"15만 군으로 노룡·성덕 1만여 군을 토벌못해, 재화는 탕진되고 힘은 다하였다." 횡해(橫海)절도사를 떼어, 덕체(德棣)절도사를 설치했다.(2月 21日) 하남도 서(徐)주의 무녕(武寧)절도부사 왕지흥이 절도사를 쫒아내고, 숙주 용교(埇橋)의 염철원·진봉선·상인들을 약탈했다.(3月 14日) 용교(埇橋)는 변수(汴水. 영제거)의 항운을 통제했고, 염철원(鹽鐵院)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회수 이남의 진봉선(進奉船)이 모이는 요지였다. 성덕군의 왕정주가 심(深)주성을 함락시켰다.(3月) 무녕절도부사 왕지흥이 회남도의 호(濠)주를 습격했다.(3月 25日) 성덕군의 왕정주가 영(瀛)주의 박야(博野)를 점령했다. 목종은 토벌할 수 없어, 왕지흥을 무녕(武寧)절도사에 제수했다.(3月 28日) 영남도의 옹(邕)주 자사 이원종이 100명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황동(黃洞)의 만족인 황소도에게 도주했다.(5月 12日) 노룡군의 주극융이 말 10,000필, 양 100,000마리를 헌상했다.(5月 28日). 당항(탕쿠트)이 관내도의 영(靈)주에서 위(渭)수 북쪽의 관마(馬)를 약탈했다.(6月) 토번이 영(靈)주의 영무(靈武)를 약탈하고(6月), 염(鹽)주를 약탈했다.(6月 23日) 당항도독 탁발만성이 관내도 염(鹽)주로 투항을 요청했다.(6月 21日) 영남도에 옹관(邕管)경략사를 2년 만에 재설치했다.(6月 29日) 하남도 변(汴)주의 선무(宣武)절도사 이원이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주했다. 병사들은 도압아 이개를 선무유후로 세웠다.(7月 4日) 이개가 2,000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송(宋)주의 녕릉(寧陵)과 양읍(襄邑)을 공파했다.(7月 18日) 송주자사 고승간과 10여 차례 전투를 벌였다. 충무절도사 이광안이 지휘하는 25,000명의 병력이 변주의 위지(尉氏)로 진격하고, 연해절도사 조화가 송주에서 이개를 격파했다.(7月 28日) 의성절도사 한충이 변주의 천탑(千塔)에서 나와 곽교(郭橋)에서 이개의 반란군을 격파하고 정주의 만승(萬勝)으로 진격했다.(8月 14日) 무녕절도사 왕지흥과 고승간이 이개의 반란군을 격파했다.(8月 6日) 패배한 이개는 심복인 도지병마사 이질에 의해 피살되었다.(8月 18日) 절서(浙西)관찰사 두역직이 대장 왕국청의 반란을 토벌했다.(9月 1日) 횡해절도사 이전락이 갑부인 덕주자사 왕직을 도륙하고 재산을 탈취했다.(9月 9日) 29세의 목종이 중풍에 걸려 거동을 못하자(11月 24日), 환관 10여 명만 곁에 두었다.(12月 5日) 우승유가 중서시랑·동평장사에 제수되었다.(823年 3月 7日) 영남도의 안남(安南)경략 육(陸)주의 요(獠)족이 반란을 일으켰다.(4月 10日) 하동도의 진(晉)·자(慈) 두 주에 보의(保義)관찰사를 설치했다.(5月 22日) 황동(黃洞)만족이 영남도 옹관(邕管)경략 선화(宣化)의 좌강진(左江鎭)과 흠(欽)주의 천금진(千金鎭)을 공파했으나(7月), 격파했다고 보고했다.(8月 11日) 재상 이봉길과 환관 왕수징이 연대하여 조정을 기울였다(9月). 황동(黃洞)만족이 안남(安南. 베트남)을 침입했다.(10月 10日) 방사(方士)들이 금석(金石)으로 지은 약(단약)을 목종이 먹었다.(824年 1月) 황동만족이 영남도 옹관경략 흠(欽)주를 약탈했다.(1月 17日) 30세의 목종이 병이 들어(1月 20日) 붕어했다.(22日) 그후에 16세의 경종 이담이 즉위했다.(1月 26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