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스카트 (문단 편집) === [[오만 제국]] === [[파일:오만 무스카트 9.jpg|width=890]] 오만 제국기에 증축된 미라니 / 자랄리 성채 무스카트 정복 이후 그를 중심으로 활발히 인도양 패권 장악에 나선 야루바 왕조는 18세기 초까지 [[스와힐리]] 해안에서 포르투갈을 축출하고 해상 제국을 세웠다. 한편 포르투갈의 경쟁자 네덜란드와는 우호를 유지하여, 1670년 무스카트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공장이 세워졌다. 하지만 해안 지역에 집중된 번영은 내륙과의 괴리감 및 후자의 소외감으로 이어졌고, 1718년 이맘 술탄 빈 사이프 2세의 죽음 이후 야루바 왕조는 내전에 돌입하였다. 그 와중에 무스카트의 알 자랄리 성채가 파괴되는 등 10년의 싸움 끝에, 1728년 오만은 사이프가 통치하는 해안과 그 사촌인 발아랍 빈 힘야르가 통치하는 내륙으로 나뉘어졌다. 그후 점차 기세가 기운다고 느낀 전자는 이란의 [[나디르 샤]]에게 군사 원조를 청하였고, 1737년 파르스 총독 무함마드 타키 칸이 이끄는 페르시아 군의 도움으로 오만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후 페르시아 군은 약탈물과 이란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1742년, 결국 폐위된 사이프가 소하르 할양을 조건으로 재차 이란에 도움을 청하였다. 그해 10월 무함마드 타키 칸의 페르시아 군이 줄파르 (라스 알 카이마)에 당도, 소하르와 무스카트를 공격했으나 그 어느 곳도 점령할 수 없었다. 1743년 초엽 병력을 지원받은 페르시아 군은 무스카트로 진격하였다. 그 근교인 무트라에 주둔하던 이맘 술탄 빈 무르쉬드는 의도적으로 무스카트를 내어주었고, 이에 페르시아 군이 입성하여 약탈에 전념하던 때에 무트라 및 무스카트의 수비대와 함께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재차 파견된 페르시아 군이 무트라를 점령하자 술탄 빈 무르쉬드는 소하르로 향하였고, 그곳에서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그후 폐위되었던 발아랍이 이맘으로 복위하였다. 한편 페르시아 군은 무스카트를 점령하였으나 쌍둥이 성채의 수비대는 맹렬히 항전하였다. 이에 무함마드 타키 칸은 동행한 사이프에게 성채들의 항복을 명하게 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이에 그는 사이프를 선상 연회에 초대하고 술로 취하게 한 후[* 이맘이란 직위에 걸맞지 않게 [[시라즈]]산 와인을 즐겼다고 한다], 이맘의 인장을 빼앗어 위조한 명령으로 성채들의 항복을 얻어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