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장친위대 (문단 편집) === 확대와 질 저하 === 무장SS 부대는 [[전쟁]]이 장기화 됨에 따라 급속도로 확충되었는데 초창기에는 전투경험이나 육군 같은 훈련교육 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전선]]에서 도망친다든가 규모가 작은 적과 싸우면서도 졸전을 벌인다든가 하여 욕을 먹기도 했다. 라이프슈탄다르테(LSSAH)는 피해를 많이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졸전에 실망한 히틀러가 [[베를린]]으로 돌아와야 할 부대를 프라하로 보내는 바람에 분위기가 나빠져서 [[1939년]] [[성탄절]]에는 히틀러가 직접 [[프라하]]로 달려가서 성탄절 연회를 베풀어주기도 했다. SS전투부대 시절부터 편성된 [[고참]]이자 비킹에서 전설적인 전공을 올린 게르마니아 연대는 폴란드전 당시 시가전에서 폴란드군의 역습에 밀리는 등 기대에 영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힘러의 적극 지원하에 최신장비와 전투경험이 있는 인원들이 계속 배속됨에 따라 점점 전투력이 강해졌다. 특히, 초창기 3개 무장SS 사단인 '라이프슈탄다르테',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 사단들은 최고의 인력, 장비 지원과 사망자가 속출하는 혹독한 실전훈련을 거듭하여 막강한 전투력을 쌓은 덕택에 전쟁 중후반쯤 되면 거의 전략예비대 성격으로 운용되기도 한다. 또한 이들의 전과를 다른 SS 사단들도 거두었다고 여기기 쉬운데, 문제는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졌다는 데 있었다. 병력소모가 급속도로 올라가고 전장은 날이 갈수록 넓어지자 무장SS도 꾸준히 확장된다. 그러나 갈수록 병력부족이 심각해져 결국 SS의 인종적 우월성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점령지인 [[프랑스]]나 [[동유럽]] 등지에서도 [[독일인]]의 [[피]]가 조금 섞였으면 징집하고, 일반 육군부대도 전속요청으로 SS로 입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독소전쟁]] 개전 후에는 그마저도 극심하게 소모가 올라가, 나중에는 [[영국]] 등의 식민지배에 반발하는 [[아프리카인]], 영국군 포로, 심지어는 '''[[소련군]] 포로'''조차 원하기만 한다면 SS로 받아들였다. [[영화]] [[레지스탕스]]에서도 SS영국의용군에 속한 [[중사]]가 꽤 비중 있는 역할로 등장한다. 게다가 중요한 무장SS의 부대이기도 했던 제12 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s-2|히틀러 유겐트]]'는 말 그대로 '히틀러 소년단' 출신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이 중심이 돼 만들어진 전투부대였던 등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다. 말기에는 [[사단]]이나 [[군단]]이라고 [[이름]] 붙여놓고 실제 규모는 수백명인 [[부대]]도 많아서 실제로 꾸준히 제대로 전투를 치른 사단은 초창기 3개 사단, 잘 봐줘야 히틀러유겐트사단까지 11개 사단 정도이다.[* 제1 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제2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제3 기갑사단 토텐코프, 제5 기갑사단 비킹. 이쪽 4개는 그로스도이칠란트와 더불어 대전기간 최고의 사단이며 제4 경찰척탄병사단 폴리짜이, 제6 산악사단 노르트, 제7 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 제8 기병사단 플로리안 가이어, 제9 기갑사단 호엔슈타우펜, 제10 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 제11 의용척탄병사단 노르트란드, 제12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정도가 정예 SS 라 부를 만하다.] 대전 초 프랑스 전선에서 잡힌 영국군 포로로만 이루어진 부대, 영국 자유군단의 병력 수는 백여 명을 간신히 넘겼다. 한편 독소전 발발 전 지원한 참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SS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이념적으로 숭상하던 "순수한" 독일인 다수는 물론이고 이질적인 [[무슬림]]들까지 받아들였다. 이런 식으로 급하게 징집한 병력이 점점 상당한 비율을 차지한다.[* 이들은 [[정예]]라는 부심에 가득하던 당시의 기존 무장SS 병력들이 불만을 품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전후에 상황이 바뀌어 하우서 등 무장친위대 장성들은 무장SS 무오설을 주장하는 회고록들을 간행하면서 이걸 '무장SS는 다민족 반공의용군'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써먹었다.][* 히틀러와 당대의 나치스는 후대의 추종자인 네오나치들과는 대조적으로 기독교 혐오증과 극한의 반유대, 반슬라브주의, 이슬람교에 호기심에 가까운 약간의 호의를 가진 자들이 많았다. 일단은 당대 독일인 다수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긴 해도 하등한 인종으로 간주하던 슬라브인을 더 혐오하고 배척하면 배척했지 무슬림과는 악연이 크지 않았다. 히틀러의 고국이자 제국 체제 하에서 수십 민족들이 얽혀 성장하면서 인종관 형성에 영향을 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보스니아 등의 무슬림 다수 지역에서 잘만 지역 기반 연대들 뽑아내서 쓴 과거도 있다. 실제로 나치스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 [[아민 알 후세이니]]와 협력관계를 구축하기도 했는지라 1세대 나치들은 무슬림계도 받아들이고 무장시키는 데 거부감이 크진 않았다. ] 이때 다민족 부대들을 만들게 된 공식적인 이유에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적인 믿음의 영향도 있었는데, 이 자는 [[유럽]]에 퍼져있는 여러 민족들 피에 사실 아리안 핏줄이 어느 정도 있다는 우생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들은 소위 하위 아리안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이 [[영혼]]을 끄집어내 다시 순수 아리안 영혼으로 만들기 위해선 이 하위 아리안 핏줄들을 끌여들여 전쟁에 싸워 죽도록 해야 된다고 믿었다. 즉,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어느 정도 기반을 두고 만든 부대들이긴 하다. 물론 현실은 이러한 비과학적인 우생학 [[궤변]]을 붙이든 말든 초창기의 숙련된 병력에 비해 낮은 기준의 병력을 마구 모으기 시작해 전투력 저하를 초래했다. 전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명성과는 달리 다른 국방군과 별반 다를 바 없거나 이름뿐인 사단들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힘러 자신도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서 공공연히 충성을 밝혔지만, 사실 전쟁 말기에는 히틀러에게 총통 자리를 넘기라고 뒤통수를 치는가 하면 [[요제프 디트리히]]가 자신보다 히틀러에 대해서 더 충성함을 알고 멀찌감치 전선으로 쫓아보내기는 등 정치적 권력에 집착했다. 이는 전쟁 지도에서 여러 무리수를 범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무장SS 사단들은 애시당초 히틀러와 힘러 등 SS 고위 인사들의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무장 당군 집단이다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육군 사단에 비해 각 부대 지휘관들의 사병집단적 요소가 강해졌다. 한때 초창기부터 편성되어 높은 전과를 올렸던 3대 사단들도 최초 [[사단장]]인 [[요제프 디트리히]]/[[파울 하우서]]/[[테오도어 아이케]] [[장군]]의 [[영지(역사)|영지]]쯤으로 통했다. 여기에 더해서 전쟁 초반에는 나름대로 육군 같은 타군의 눈치를 보던 SS가 전쟁 말기에 이르면서 제멋대로 행동해서 국방군과 갈등이 더 깊어졌다. 원래 SS가 창설된 초창기에는 히틀러가 SS를 SA같이 비대한 크기로 만들지 않으려고 했고, 독일군의 반발 때문에 각종 중장비 공급에서 SS가 육군에 우선권이 밀려서 노획장비를 적지 않게 운용해야 했다. 초창기 3개 사단 중에서도 토텐코프는 [[T-34-76]]을 후반기인 1943년 시점에도 20대 이상 운용했으며 다스 라이히는 아예 대대급을 보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독일 국방군 육군에 비해선 장비 지급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그러나 1943년 후반기에 이르면 독일 육군의 위상 하락과 함께 히틀러와 힘러의 지원으로 무장SS는 최신예 무기를 육군보다 더 먼저, 더 많이 지급받는데다가 이들이 아돌프 히틀러를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면서 육군은 이들을 '건방진데다가 인간 같지 않은 양아치들이 총통만 믿고 잘난 체한다.' 정도로 평하였다. 전쟁 당시 무장SS와 육군 사이에서는 항상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곤 했다고 한다. 그나마 전쟁이 잘 풀리던 초중반에는 조용한 편이지만 서로 상대방을 깔보는 경향은 현저했다. 전 무장SS 중사였던 [[헤르베르트 브루네거]]의 회고에 의하면, 데미얀스크 포위전과 하르코프 전투에서 무장SS와 육군이 서로 욕을 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45년 전쟁이 후반으로 치닫으면서 독일 [[국력]] 자체가 누구에게 특별대우를 해줄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전투가 지속됨에 따라 부대를 해체하고 소속에 상관 없이 재편성하는 과정이 지속되면서 앞서 말한 분위기도 사라졌다. 전쟁 중반에도 무장SS가 받는 특별대우에 많은 장병들이 불만을 품기에 이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고, 히틀러도 이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으나 힘러 때문에 흐지부지되어버렸다. 나중에 힘러와 만난 [[오토 카리우스]] 육군 기갑중위도 이러한 문제에 불만을 품고 이의를 제기할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