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진피화 (문단 편집) == 결과 == 정월에 임견미, 이성림, 왕복해, 염흥방, 도길부, 염정수, 김영진, 임치 등 [[권문세족]]들이 줄줄이 처형되었고, 이들의 가족이나 친척 및 이들에게 빌붙은 자에 해당하는 김용휘, 이존성, 서신, 임제미, 홍징, 임헌, 이송, 임공위, 임공약, 임공진, 왕덕해, 정각, 박인귀, 이희번, 왕익순, 신권, 신봉생, 이미생, 민중달, 홍상빈, 홍상보[*A 洪尙溥. '홍상부'로도 읽힘. 고려사 국역에 '홍상보'로 번역했으나, 남양홍씨 족보에는 '홍상부'로 번역함.], 홍상연, 김만흥, 염국보, 염치중, 안조동, 윤전, 최지, 김함, 김을정, 김조, 임맹양, 도희경, 도간, 도운달, 전빈, 안사조, 박중용, 신정, 감성단, 조원길 등 50여 명도 참수되었다. 이들 일당 중에 도망친 서규를 이안생이 체포해 죽였는데, 체포 과정에서 이안생이 서규의 처를 탐한 일이 드러나자 이안생도 처형되었고, 서규의 처는 빈객을 대접하는 관부인 전객시의 종이 되었다. 처형된 이들의 수장인 이인임은 경산부로 유배갔고, 이인민은 계림으로 유배갔다. 이인임의 가족 또는 친척에 해당하는 이환, 박형은 곤장을 맞은 후에 변지로 유배를 보냈고 권집경은 안동, [[이직(조선)|이직]]은 전주로 유배를 보냈다. 그뒤 [[최영]], [[이성계]], [[이색(고려)|이색]] 등은 각각 [[문하시중]], 수문하시중, 판삼사사에 임명되어 집정 대신이 되었으며, [[우현보]], 윤진, 안종원 등은 문하찬성사, 문달한, 송광미, [[안소]] 등은 문하평리, [[성석린]]은 정당문학, 왕흥은 지문하사, 인원보는 판밀직사사에 임명되었다. 2월에는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임견미]] 등이 탈취한 땅의 현황을 조사하면서 1,000명에 이르는 임견미 등의 가신과 종들을 체포해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는데, 임견미, 반익순, [[염흥방]], 도길부의 재산을 조사하면서 그 처들은 고문을 당해 옥중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사형된 자들의 자손도 몰살당했기에 숨어서 죽음을 면한 자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며,[* 이를 주도한 최영은 나중에 죽음을 앞두고 생전에 탐오라고는 저질러본 적이 없다고 호언하면서도 "임견미와 염흥방을 죽일 때는 내가 많이 지나쳤었다"고 후회했을 정도였다.] 이성림, 왕복해, 이존성, 김영진, 신권, 손중흥 등의 아내, 임치의 여섯 살짜리 아들을 임진강에 던져서 수장시키고 사형당한 자의 처, 딸 등 30여 명을 관노로 삼았다. 3월에는 [[하륜]], [[이숭인]], 박가흥 등이 [[이인임]]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곤장을 맞은 후에 각각 양주, 통주, 순천으로 유배당했다. 위 명단에서 홍징은 염흥방의 매부였는데, 아들 홍상빈, 홍상보[*A], 홍상연과 함께 연좌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홍징의 여섯 아들 중 넷째, 다섯째[* 홍상검(洪尙儉).], 여섯째[* 홍상리(洪尙利).]는 살아남았으며, 넷째 홍상직은 전라도 장성에 은거했는데, 그 아들이 바로 소설 [[홍길동전]]의 모티브인 조선 초기의 유명 도적 [[홍길동]]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