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학대사 (문단 편집) == 생애 == [[야사(역사)|야사]] 등지에서는 그가 [[귀주성 전투]]의 [[영웅]]인 [[박서]]의 5세손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박서의 본관인 죽산 박씨 족보에도 그가 박서의 후손이라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그의 출생지에 관해서도 [[경상남도]] [[합천군|합천]]군 대병면 합천댐 수문 아래 생가터로 추정된 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경상남도]] [[합천군|합천]]이라는 설과 [[충청남도]] [[서산시|서산]]이라는 의견이 분분하다. 따라서 어렸을 때 미미한 신분으로 추정된다. 야사에서는 모친이 수태하던 날 태몽으로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책과 부러진 붓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이후 그의 운명을 암시했다. [[충목왕]] 즉위년(1344) 18살에 출가하여 불교를 공부하다가 충목왕 2년(1346)에 능엄경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암자 등에서 수행정진하였다. [[공민왕]] 2년(1353) 27세 나이에 [[원나라]]의 수도 [[대도#s-4]]로 유학을 떠났다. 대도에서 서역 출신 승려이자 당시 고려 불교계에서 부처나 다름없는 고승으로 추앙한 지공(指空, 1300-63)대사를 만나 도를 인가받았다고 한다. 한편 이미 고려에서 유명한 고승이었던 [[나옹(승려)|나옹]]화상(懶翁和尙)[* 여기서 [[화상(동음이의어)#s-5|화상(和尙)]]이란 덕이 높은 승려를 칭하거나,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역시 원나라로 갔다가 무학을 만났고, 무학은 나옹을 스승으로 모셨다. 무학은 스스로가 지공대사와 나옹화상, 두 고승의 공동제자라고 주장하였다. 나옹화상 또한 지공의 제자였으므로 무학의 사승관계는 조금 꼬였다. 이후 공민왕 5년(1356) 30세에 다시 [[고려]]로 귀국했다. 나옹화상 역시 공민왕 7년(1358)에 고려로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는데 이때 무학과 다시 만났다. 무학은 그후 함주로 가서 [[태조(조선)|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의 묘자리를 잡아주어 이 때부터 무학과 이성계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왕]] 10년(1384)부터 두 사람은 사제지간을 맺을 만큼 본격적으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정도전]]이 [[태조(조선)|이성계]]와 손을 잡고 [[역성혁명]]을 꾀하려던 이유 중에는 정도전이 노비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서얼]]이기에 신분상승을 원한 점도 있다는 주장이 있듯, 무학대사 역시 신분상승을 목표로 이성계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 태조 원년(1392) 10월 9일에 왕사가 되었다. 같은 달 11일이 이성계의 탄신일인지라 깨달음에 대해 강의했는데, 불법의 취지를 능히 해설하지 못해 중들 가운데 탄식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로 보아 [[불교]] 이론 쪽은 그다지 깊게 알지 못했고, 도참사상 쪽에 통달한 [[스님]](?)이었을 수도 있다. [[선종(불교)|선종]] 쪽에 가까운 수행을 했다면 [[불경]]에 대해선 자세히 모를 수도 있다. 지금 [[조계종]]에도 그런 승려들이 많다.][* 달리 생각하면 실록을 쓴 유학자들의 불교 깎아내리기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당장 무학대사의 입적 뒤의 기록만 봐도 "세상에서 고승이니 왕사니 받들더니만 죽을 때가 되어서는 보통 사람처럼 괴로워서 신음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화장하고 난 뒤에도 뭐 별거 없더만?"라는 식으로 다소 시니컬하게 기술되었도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509020_004|#]]] 태조 2년(1393) 2월 11일에는 한양의 중심인 높은 언덕에 올라가 땅의 형세를 관람하면서 [[이성계]]가 묻자 무학은 능히 알 수 없다고 답했다. [[태종(조선)|태종]] 2년(1402) 7월 13일에는 [[회암사]]의 감주가 되었고, 같은해 11월 9일에는 이성계가 함주에 있을 때 [[태종(조선)|이방원]]의 명으로 이성계에게 가서 이방원이 속히 돌아오기를 청한다는 것을 전했다. 태종 5년(1405) 9월 20일에 [[향년]] 79세로 [[입적]]했고 그 [[사리(불교)|사리]]는 [[회암사]] [[승탑|부도]]에 안치되었다. 3년 후에는 태조 [[이성계]]도 승하했으며 태종 10년(1410) 시호를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무학(無學)이라는 법호보다는 자초(自超)라는 법명으로 더 많이 나온다. 일관되이 [[숭유억불]]이란 입장을 견지한 태종 입장에서 무학은 껄끄러운 존재였던 듯하다. 본인이 불교나 무학을 어떻게 생각하든, 아버지 태조가 무학에게 [[왕사#s-2|왕사]](王師) 직위를 내리고 그와 가까이 지내며 존중했던 만큼, 태종으로서도 어느 정도는 격식을 갖추어 대접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태종 10년(1410) 7월에 무학에게 시호를 내리면서 [[변계량]]에게 무학을 기리는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실록은 태종이 무학을 기리는 비문을 짓도록 한 이유를 "상왕이 그를 존중하고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간결하게 설명하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태종은 신하들에게 계속 자신은 무학을 고승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을 피력했다. >불씨(佛氏)의 도(道)는 그 내력이 오래 되니, 나는 헐뜯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으려 하나 그 도리를 다하는 사람이면 나는 마땅히 존경하여 섬기겠다. 지난날에 승려 자초(自超)는 사람들이 모두 높히 받들었으나, 그는 끝내 도릉 얻은 일이 없었다. 이와 같은 무리를 나는 노상(路上)의 행인과 같이 본다. 만약 지공(指空)과 같은 승려라면 어찌 존경하여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태종실록 태종 14년(1414) 6월 20일자 6번째 기사 왜 하필 태종은 무학을 인도 승려 지공과 대비하여 말했을까? 지공과 나옹은 고려말 불교계에서 위상이 어마어마한 고승이었고, 무학은 자신이 지공과 나옹의 공동제자라고 내세웠다. 나옹 또한 지공의 제자였으므로 어느 쪽으로 보든 결국 무학은 지공의 법맥에 속한다. 태종은 일부러 무학을 그의 스승 지공과 대조하여 '스승만 못한 범속한 승려'라고 격하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 불교계는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을 부처의 법을 전하는 조사(祖師)로 여겨 조사전에 모시기도 하였고 '삼화상(三和尙)'이라고 불렀다. '삼화상'이라고 하면 단어 자체만으로는 '고승 세 분'이란 뜻일 뿐이지만, 심지어 현대 한국 불교에서도 '삼화상'이란 단어는 지공-나옹-무학을 함께 일컫는 단어로 통할 정도이다. 한국 불교계에는 [[불상]]을 만들어 사찰에 봉안하기 전에 행하는 불복장의식(佛腹藏儀式)이라는 복잡한 의례가 있다. 불복장의식에는 증인이 되어줄 역할로 삼화상을 청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불교계에서 삼화상이 어떤 위상이었는지를 드러낸다. 자장, 원효, 의상, 도의, 도선, 지눌 같은 역사나 전설 등으로 이름을 남긴 승려들을 제치고 지공-나옹-무학이 조선 불교계를 대표하는 조사로 대우받은 것이다. [[정조(조선)|정조]] 16년(1792)에는 개종입교 보조법안 광제공덕 익명흥운 대법사(開宗立敎普照法眼廣濟功德翊命興運大法師)란 호를 추가로 받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604124_001|실록의 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