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경시 (문단 편집) == 역사 == ||<-10> '''문경시 행정구역 변천사''' || || 문경군[br](聞慶郡, 1914)[br] || → || [[점촌시]][br](店村市, 1986)[br][[문경군]][br](1986) || → || '''문경시'''[br](1995) || [[원삼국시대]]에는 [[삼한]] 중 [[진한]] [[사벌국]]의 영역이었다. [[삼국시대]]에 들어서는 사벌국이 [[신라]]에 정복되어 간접지배 기간을 거쳤고, [[눌지 마립간]] 때부터는 신라왕들이 추풍령 일대를 [[진골]]들을 억누르기 위해 왕실한테만 충성하는 직할군을 양성하는 왕실 직할지로 특화하여, 신라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로 신라 왕실 직할군으로 정예병이나 근위대는 문경을 포함한 [[충청북도]] 동부 ~ [[경상북도]] 서부에서만 배타적으로 지원을 받아 편성되는 인원들로만 구성된다. 행정구역상 당시 문경시는 최상위 행정구역인 사벌주(沙伐州)[* 현 경상북도 [[상주시]].] 소속으로 고동람군(古冬攬郡)[* 현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소속의 가해현(加害縣, 현 가은읍), 관현(冠縣, 현 문경읍)[* 고대 [[신라어]]로 '고시갈이(곳갈이)'라 불렸는데, 오늘날 말로 고깔을 뜻한다. 한자 '관'은 고깔을 훈차한 것.], 호측현(虎側縣, 현 호계면)의 세 현과 수주군(水酒郡)[* 현 경상북도 [[예천군]].] 소속의 근품현(近品縣, 현 산양면), 난산현(蘭山縣, 현 동로면의 남단)의 두 현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남북국시대]]에 들어서는 [[경덕왕]]의 지명 한화정책 때 가해현은 가선현(嘉善縣)으로, 관현은 관산현(冠山縣)으로, 호측현은 호계현(虎溪縣)으로, 근품현은 가유현(嘉猷縣)으로, 난산현은 안인현(安仁縣)으로 각각 개칭된다. 상위 행정구역인 고동람군은 고령군(古寧郡)으로, 수주군은 예천군(醴泉郡)으로, 사벌주는 상주(尙州)로 개칭된다. [[후삼국시대]]에 들어서는 이 일대의 [[호족(한국사)]]으로 [[아자개]]가 유명했고, 그 아들인 [[견훤]]이 [[후백제]]의 건국왕이 된다. 앞서 설명한대로 당시에는 문경 일대가 상주의 휘하에 있었고 그 직할지와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지금의 문경 지역 사람이던 견훤이 상주 사람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906년에는 [[태봉]]의 영역이 되지만 907년에는 후백제의 영역이 되었다가, 918년 고려에 귀부한 아자개 이후 문경 일대의 패권을 쥐게 된 호족인 [[흥달]]이 927년에 [[고려]]로 귀부하면서 문경은 상주와 마찬가지로 고려의 영역이 된다. 문경 지역 입장에서는 이것이 왕건의 고려와 첫 인연이 되는데 그러나 이는 흥달의 큰 판단 착오였다. [[서라벌 기습]]과 [[공산 전투]]가 그 직후에 벌어졌고 고려의 영향력이 경북에서 거의 사라진 시기에 후백제군이 상주에 들이닥쳐 문경 일대는 상주와 함께 후백제의 영역이 된다. 그전까진 고려든 후백제든 그 일대를 장악한 호족의 귀부 여부로 귀속이 결정되었으나, '''다름아닌 자기 고향이자 가족들의 세력권인 문경 일대와 상주가 이런 식으로 고려와 후백제를 왔다갔다하는 것을 견훤이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걸'''로 보인다. 그 이후로는 후백제가 아예 군사력을 상주시켜 후백제로의 귀속을 확고히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929년 현 가은읍 일대의 호족 [[선필]]이 후백제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성을 지켜낸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927년 견훤의 문경 일대 장악 후 929년 사이 어느 시점에서 가은읍 호족 선필이 고려에게 귀부하면서 적어도 오늘날 문경 일대 중 가은읍은 고려의 판도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후백제는 고려가 경북 일대에서 고창 전투로 반격에 성공한 이후에도 936년도에 멸망하기 직전까지 가은읍을 제외한 문경과 상주는 판도로 유지하지만, 견훤과 아자개의 출생지인 가은읍만은 또 다시 후백제에게서 벗어났기에 견훤 입장에서는 대단히 뼈아픈 일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내내 고려를 지지했던 옛 [[마한]] [[침미다례]]의 영역 중에서 신라 지방군 중 현웅정(=미다부리정)의 소재지였던 현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일대만은 기이하게도 견훤을 내내 지지했기에 유독 그 지역만은 일관되게 후백제 판도였지만. 견훤의 출생지는 이렇게 견훤에게 부정적이었으나, 견훤이 신라군 군관으로서 젊은 시절 커리어를 이어갔던 지역들은 견훤에 대한 지지도가 기이할 정도로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문경현이었다가 [[1895년]] [[23부제]]가 실시되어 안동부 문경군이 되었다. [[1896년]] 23부 체제가 다시 [[13도]]로 개편되어 경상북도 문경군이 되었다. [[1906년]] 예천군의 동로면과 화장면이 문경군에 편입되었고, 상주군의 산서·산남·산동·산북·영순면이 편입되었다. [[1914년]] 용궁군의 서면, 함창군의 동면 일부를 편입하였고, [[1933년]] 신북면이 문경면에 통합되었다. [[1956년]] 7월 8일 호서남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호서남면의 중심 마을인 점촌리의 이름을 따라 점촌읍으로 개칭되었고, [[1963년]] 1월 농암면 삼송리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에는 문경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가은면과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를 합쳐 가은읍이 되었다. [[1986년]] 1월 점촌읍과 문경군 호계면 별암리 일부가 합쳐져 [[점촌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1989년]]에는 상주군 함창읍 윤직리 일부를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자로 [[점촌시]]와 문경군이 합쳐져 [[도농복합시]]가 되었다. 1996년 산북면 거산출장소, 동로면 수평출장소를 폐지하였다. [[2004년]] [[1월 1일]] 행정동들의 이름이 변경됐다. * 점촌동 → 점촌1동 * 중앙동 → 점촌2동 * 신흥동 → 점촌3동 * 신평동 → 점촌4동 * 모전동 → 점촌5동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