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익환 (문단 편집) === 초반 생애 === 흔히 [[북간도]]로 표현되는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시|화룡현]] 명동촌(明東村)[* 현재는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智新鎭) 명동촌으로 남아 있다.]에서 1918년 아버지 문재린과 어머니 김신묵 사이에서 태어났다. 문익환 목사 집안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윤동주]] 시인 집안, [[김약연]] 집안 등과 함께 5가문이 집단적으로 이주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용정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조선인 공동체가 생겨난다. 자립과 개척성향이 강했던 명동촌의 분위기와 항일 민족의식을 지녔던 가풍의 영향을 받으며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용정광명학교를 거쳤다.[* 출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9632|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학창시절 당시 저항시인 [[윤동주]], 윤동주의 사촌형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 [[장준하]], 정치인 [[정일권]][* 놀랍게도 절친 [[정일권]]이 사망한 다음날 문익환도 사망했다.]과 절친한 [[지인]]이었다고 한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문익환이 윤동주에게 자신이 고심해 적은 시를 보여주자 윤동주의 반응은 "이게 시냐?"라는 것이었다고(...). 이에 쇼크를 받은 문익환이 시인의 길을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다.] 아들인 [[문성근]]은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아버지가 윤동주, 장준하에 대한 마음의 부채가 있었다"며 "윤동주 장준하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젠 내 차례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고 말했다.[* [[윤동주]]는 간도 명동소학교 동창이고, [[장준하]]는 일본 도쿄의 일본신학교에서 문익환과 같이 수학하던 사이였다. 1976년 민주구국선언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도 1975년 장준하의 의문사에 충격을 받아서였다고 한다. 이들 3명과 반대의 길을 간 [[정일권]]까지 합치면 이래저래 한국 현대사에 대단한 영향을 끼친 4명의 동창생들이다.]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윤동주를 추모하며 헌정시 '''동주야'''를 쓰기도 했다. >'''동주야''' > >너는 스물 아홉의 나이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 섰구나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가는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이후 [[평양]]신학교[* 현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려 했으나, [[근본주의]]적인 학풍을 가진 평양신학교를 다니는 것보다는 일본 유학을 가는 것이 좋겠다는 부친 문재린(文在麟, 1896–1985)의 권유로 [[도쿄]]의 일본신학교에 입학한다. 여기서 [[성서비평학]]을 공부하게 되는데, 원래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을 중시하는 [[장로회]] 출신의 문익환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는 익숙하였으나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비평하는 것에는 적응하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신학교수의 충고를 받고 학문적인 영역으로서 존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만주국]] 봉천신학교를 졸업했으며, 아들 문성근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말기 조선인들에 대한 징병령이 내려지게 되자 "나는 일본을 위해서 죽을 수 없다"며 직접 신학교 교장을 찾아가서 담판을 짓고 난 뒤에 만주로 돌아갔다고 하며, 교장이 신학자로서의 양심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를 신고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때 같은 학교를 다니던 [[윤동주]]와 [[장준하]] 역시 조선인들에게 떨어진 징병령에 대해 각자 저마다 다른 선택을 했고, 이때의 선택이 그들의 앞날을 결정짓게 된다고 문성근이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언급했다.] 1944년에 일본 유학 중에 만난 박용길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낳았다. 1947년 한국신학대학교[* 현 [[한신대학교]]. 중간에 교단분리되었을 때 잠시 조선신학교로 이름을 바꾼다.]를 졸업했다. 사실 문익환은 해방 이후 반공주의자였는데, 그 이유는 만주에서 살던 시절 중국 공산당의 탄압으로 인한 가족의 이주 그리고 해방 후 소련군에 의해 부친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을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49년에는 기독교반공청년단체에도 관여했을 정도. 물론 활발히 활동한건 아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미국 유학시절 한국전쟁이 터졌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자원입대, [[미군]]통역장교로 활약하였다.[* 197~80년대 민주화운동의 버팀목이 되는 문익환, [[리영희]], 정경모도 모두 미군통역장교 출신이다.] 이후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54년에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받는다. 이후 귀국하여 [[연세대]], [[한신대]] 등에서 신학 강의를 하였다. 1970년대에는 [[공동번역성서]] 구약 번역에 참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