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 (문단 편집) == 해외의 반응 == 바로 바다 건너 '''[[중화민국]]'''의 경우는 '''경악 그 자체'''였다. 중화문명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전통과 문화를 강조하던 중화민국은 본토에서 중국 문명의 진수인 각종 문화재와 중국 사상 그 자체이자 거인 중의 거인인 공자 묘까지 때려부수는 대참상에 멘탈이 붕괴했다. 대만에서라도 중국문명을 사수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어 1966년, 쑨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중화문명부흥운동]]'''을 거국적으로 시행하였다. 이는 중화문명을 수호하자는 민족적 결의와 더불어, 중화문명을 파괴하는 중공은 적법한 중화문명의 계승자가 아님을 주장하는 [[프로파간다]]로도 활용되었다. 같은 공산권 국가에 유교 문화권이었지만 중국과는 역사적으로 앙숙인 [[베트남]] 역시 문화대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특히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던 1960년대 말 당시 베트남의 지도자였던 [[호찌민]]은 문혁 시기 중국에 갔다온 외교관들을 통해서 문혁 당시 중국에서 홍위병들이 저지르고 있는 만행을 보고받자 '이런 것은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 정치가 아니다'라며 개탄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문혁 당시만 해도 '''들어오는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유럽권에서는 '''문혁을 찬양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사실 문화대혁명과 같은 운동들이 구시대의 악습을 제거한다는 목적도 있었다. 까놓고 인도의 카스트 같은 것들이 중국 내 민족들에게도 많이 있었는데 그런 악습에 찬동하는 사람들을 초토화해서 많은 악습이 사라지긴 했다. 오히려 이런 면에서 대규모의 혼란을 겪음으로 인해 구체제의 악습이 제거되는 효과는 있다. 예를 들면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으로 미군 등 연합군의 군정을 겪으며 프로이센/나치와 일제의 잔재가 어느정도나마 옅어지거나 철저히 파괴되어 새 국가 정체성을 가지게 된 [[일본]]과 [[독일]], 1950년대 [[6.25 전쟁]]으로 신분관습 등 조선/일제강점기 때의 구체제의 잔재들이 완전히 뿌리뽑힌 [[한국]], 자국 내부의 이슬람교와 마론파 기독교, 이슬람교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해묵은 종파 갈등이 [[레바논 내전]]과 [[제2차 걸프전쟁]]이 터지고 나서야 국민통합과 민주주의가 자리잡힌 [[레바논]]과 [[이라크]], 1990년대 초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내부 종족 갈등으로 르완다 내전이 일어나 자국민 80만 명이 내전 당시 학살로 죽고 나서야 완전히 국민국가로 통합된 [[르완다]], 1991년 소련 해체 과정에서 독립 이후에 친러와 반러간 노선 갈등이 극심했다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2022년 러시아의 침공]]으로 반러시아로 국론이 통합된 [[우크라이나]]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이런 부차적 효과만을 바라보고 참혹했던 격변기를 찬양하는 것은 극히 자제해야 된다.] 거기에 발맞추어 [[일본 신좌파]]들 중 일부 분파들은 문혁을 대단히 찬양했다.[* 특히 일부(일본공산당 혁명좌파, 게이힌 안보공투 등)는 아예 대놓고 [[마오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그리고 이들 중 게이힌 안보공투는 훗날 [[적군파]]와 통합하여 연합적군이 된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보다 자세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 뒤로는 '''이를 찬양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68운동]]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68혁명 당시 대중운동을 주도했던 가장 큰 계파가 바로 [[신좌파]], [[무정부주의]], [[마오주의]]였다. 마오주의는 결국 제 3세계 깡촌에서나 살아있는 사상이 되었다.]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도 게릴라 군대답게 마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렇게 된 데는 당시 문혁의 기능 중 구습타파와 관료제 비판이라는 기능만 부각되어 선전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쨌든 당시 중국은 [[제3세계]]의 일원이었고, 그 중에서도 소련과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하는 한 축으로 기능했다. 공산당의 영도가 아닌, 농민을 중심으로 대중과 함께 하는 혁명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당시는 소련과 코민포름의 패악질에 전 세계가 질려있던 터라, 마오주의와 문화대혁명도 일종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전공투]]의 [[도쿄대]] 점거 당시, 도쿄대에는 [[체 게바라]]와 [[마오쩌둥]]의 사진이 동시에 내걸렸고, [[68운동]] 당시 소르본 대학교 정문에도 [[블라디미르 레닌]]과 마오쩌둥의 사진이 걸렸다. [[비틀즈]]의 [[존 레논]]은 혁명에 대한 회의를 담은 [[Revolution 1]]이라는 노래에서 문화대혁명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 "But if you go carrying pictures of '''Chairman Mao''', You ain't going to make it with anyone anyhow. [*한글번역 '하지만 당신이 [[마오쩌둥|마오]] 주석의 사진을 들고 다닌다면, 어떤 식으로든 누구와도 이뤄내지 못할 거야.']" 여기서 이 'Chairman Mao'가 바로 마오쩌둥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8억 인과의 대화》[* 사실 《8억인과의 대화》는 리영희가 직접 지은 서적은 아니고 번역서인데, '''당시 기준으로는''' 중국에 대해 나름대로 자세하게 알 수 있는 르포집이기는 했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좀 거시기한 게 사실이다.] 등을 지금 읽으면, 문혁 찬양 대목에서 정신이 우주로 날아가는 걸 느낄 수 있다. 리영희는 나중에 이를 두고, "당시에는 문혁에 대한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없었다"는 식으로 해명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 북한과 중국에 관한 자료를 가장 많이 열람한 사람이 리영희 교수였고, [[조선일보]] 재직 시에도 동북아시아권 전문가로 나름대로 인정을 받던 사람이 바로 리영희였다는 점에서 이는 아쉬운 일이다.[* 리영희 뿐만 아니라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을 미제에 맞선다고 지지한 [[장폴 사르트르|사르트르]]처럼, 서구의 수많은 지식인들도 비슷한 일을 저질렀다.] 좀 더 개념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사실 [[유럽]]의 [[모더니즘]]과 문화대혁명은 사상적으로 뿌리가 같다.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간은 물질에 지배되는 존재이며, 새로운 문물이 나온 것은 새로운 시대이므로, 그에 맞는 새로운 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다만 '''유럽은 과거와 단절하긴 했어도 '파괴'하지는 않았으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 중국은 그저 과거를 파괴하기만 했다'''. 인간이 사상을 잘못 이해하고, 무분별한 선동을 가려내지 못하면, 어떠한 비극이 발생하는지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의 대혼란 속에서 입은 물질적, 정신적 피해는, 중국의 발전을 수십 년 늦추는 데 일조하였다. 또 이웃 [[북한]]은 겉으로는 중국의 문혁을 극좌주의라며 깠지만, 그 아이디어를 사실상 그대로 들여와 북한의 독재 체제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 사용했다. 특히 [[김일성]]의 뒤를 이어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은 문화 부문의 지도를 시작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할 때, 장칭을 필두로 한 4인방의 문화 정책을 거의 그대로 따라 했고,[* 가령 중국의 양판희를 모방해 혁명가극 창작 운동을 벌였고, 영화나 무용 등 나머지 장르에서도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여 항일 [[빨치산]] 이래의 전통을 계승한 작품처럼 선전하고 다녔다.] 거기에 [[주체사상]]으로 색을 입혀 독자적인 것처럼 꾸며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비판이 진행되어 잘못을 인정하고 고친 중국과 달리, 북한에서는 이것이 현재진행형이고, 지도자의 위대한 업적으로 찬양받고 있다. 현대 중국의 노년층들은 북한을 볼 때마다 문화대혁명의 기억이 떠오른다고 하는데, 1960~70년대에 창작된 북한의 가극들이, 21세기에 와서도 중국에서 순회공연을 벌이며 흥행하고 있는 것도, 이 시대에 대한 [[추억팔이]]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