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 (문단 편집) === [[2인자]]가 된 린뱌오와 몰락 === 마오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각각 가택연금과 트랙터 노동자 신세가 되어버려 정계에서 사라져 버리고 난 뒤, 고령의 마오에게 후계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마오는 자신의 최측근이자 문혁(文革)의 일등공신인 [[린뱌오]]를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했다. 참고로 린뱌오의 공식 칭호는 '''마오의 충실한 [[전우]]'''였다. 마오는 린뱌오를 크게 신뢰했고, 모든 공식 행사에서 ‘'''마오 주석과 린 부주석'''’이란 식으로 호칭되었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1962년, [[중국-인도 국경분쟁]] 때 [[인도군]]을 물리친 공을 세운 데다, 마오의 충실한 [[사냥개]]가 되어 [[동네북]] 류사오치를 마구 물어뜯었기 때문이다. 린뱌오의 위상은 [[1969년]] 제9차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새로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린뱌오는 마오에 이어 제2인자 자리를 차지했다. 저우언라이는 4위로 밀려나 더 이상 린뱌오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정치국 상무위원은 서열 순서에 따라 [[마오쩌둥]], [[린뱌오]], 천보다, [[저우언라이]], 캉성 순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천보다보다도 서열이 밀리는 굴욕을 당했다. 바야흐로 린뱌오의 시대였다. 하지만 린뱌오는 좀 더 확실한 미래 권력의 발판을 얻고 싶어 했다. 그래서 류사오치가 실각한 뒤, 폐지된 국가주석직의 복원을 추진했다. 마오를 국가주석에 앉히고 린뱌오가 국가부주석에 앉으면, 마오 사후에 자동적으로 린뱌오가 국가주석직을 승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9년 [[중국-소련 국경분쟁]]에서 린뱌오는 강경한 저항론을 주장하다가 마오쩌둥과 충돌했다. 소련이 핵공격까지 시사하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마오쩌둥은 소련을 막기 위해 미국과 손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예젠잉, 쉬샹첸, 녜룽전 등 원수들도 대부분 동의했지만 린뱌오는 인민해방군만으로 충분히 소련과 미국을 동시에 막을 수 있다면서 수정주의자를 막기 위해 제국주의자와 손잡을 수 없다고 반발했지만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정신 나간 대국 쇼비니스트라고 면박주면서 그를 데탕트 문제에서 배제하고 저우언라이, 예젠잉 등을 앞세워 [[헨리 키신저]]와 접촉했다. 위신에 타격을 입은 린뱌오는 천보다와 손을 잡고 자신의 지위를 다시 회복 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1970년]] [[8월 23일]], 려산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9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에서, 천보다가 총대를 메고 국가주석직의 복원을 제안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마오는 천보다의 발언을 비난하면서 그를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해임시켜 버렸다'''. 마오는 국가주석직 복원을 린뱌오가 자신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시도로 생각했다. 사실 이런 의심에는 린뱌오의 실수도 불을 붙였다. '''천보다의 발언이 비난받았음에도 린뱌오는 마오에게 승진시켜 달라고 징징댔기 때문.''' 결국 국가주석직 복원 시도가 무산되고 린뱌오는 무력감을 느꼈다. 린뱌오를 의심하기 시작한 마오는 린뱌오의 권력과 당내 영향력을 점점 줄이며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러자 초조해지기 시작한 린뱌오와 그의 측근들은, 결국 아직 남아있는 군권을 이용해 '''마오를 축출,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린뱌오의 아들인 [[린리궈]]가 린뱌오를 지지하는 군내 세력들과 함께 꾸민, 소위 '''[[571 공정]]'''이라 알려진 이 음모는, 마오를 제거하고 공군 폭격과 병력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571 공정에 린뱌오가 얼마나 개입했는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린뱌오가 직접 지휘했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린뱌오보다는 아들 린리궈가 더 주도적이었다는 말도 있다. 자료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음모는 1971년 9월 8일부터 9월 10일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마오는 중국 남부를 기차로 순시 중이었는데, 일설에는 마오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습격을 당했다고도 하며, 또 다른 설에는 마오를 [[암살]]할 것이라는 음모가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어, 마오가 일정을 바꿔 암살을 피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 시점에 음모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고, '''어떤 시도였든 간에 결국 실패했다'''. 일이 틀어지자 린뱌오는 아들 린리궈와 가족들, 측근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망명하려 했다. 그러나 린뱌오 일행이 탄 비행기는 소련까지 가지 못하고, [[몽골]] 상공에서 추락했다. 이를 [[9.13 사건]]이라고 한다. 린뱌오 일행이 탄 비행기의 추락원인도 불분명한데, 중국군이 [[미사일]]로 격추했다는 설과, 연료부족 혹은 기기불량으로 추락했다는 설이 분분하다. 린뱌오가 탄 비행기는 [[총알]]이 뚫지 못하는 특전비행기라서 아주 강한 미사일로 격추시켰다는 소문도 있으나, 물론 말이 안 된다. 비행기는 [[전차]]가 아니고, [[A-10]] [[공격기]]처럼 장갑을 미친 듯이 두른 비행기마저도 '''기체에 구멍이 뻥뻥 나도 좀 더 오래 날 수 있는 정도'''지 [[치요아버지|총알 튕겨내는 게 아니다]]. 물론, 튼튼하게 만들면 [[보병]]용 [[소총]] 총알이야 튕겨내겠지만, 비행기에 '''그딴 장갑은 쓸 데가 없다'''. 미사일도 규격화되어 생산되는 물품이지, 아주 강한 미사일을 따로 순식간에 뚝딱 제조해서 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격추설 외의 정설은 린뱌오 일행이 하도 급하게 달아나느라 연료도 채우지 못하고 출발했기 때문에 연료 부족으로 중도에 추락했다는 것이었으나 2016년 해금된 몽골 기밀문서에 따르면 조종사의 실수였다고 한다. [[https://m.yna.co.kr/view/AKR20160912147500089|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