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물산장려운동 (문단 편집) == 결과 == > 물산 장려 운동의 사상적 도화수가 된 것이 누구인가? 저들의 사회적 지위로 보나 계급적 의식으로 보나 중산 계급임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적어도 중산 계급의 이익에 충실한 대변인인 지식 계급, 또 솔선하여 물산 장려의 실행적 선봉이 된 것도 중산 계급이 아닌가. > 실상을 말하면 노동자에게는 이제 새삼스럽게 물산 장려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네는 벌써 오랜 옛날부터 훌륭한 물산 장려 계급이다. 그네는 자본가, 중산 계급이 양복이나 비단옷을 입는 반면 무명과 베옷을 입었고, 또 저들 자본가가 위스키나 브랜디나 정종을 마시는 반면 소주나 막걸리를 먹지 않았는가? > ....(중략).... > 이리하여 저들은 민족적, 애국적이라 하는 감상적 미사로서 눈물을 흘리며 저들과 이해가 전연 상반된 노동 계급의 후원을 갈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적으로 자각한 노동자에게 있어서는 저들도 외래 자본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며, 따라서 저들의 전략에 빠져 계급 전선을 몽롱케는 못할 것이다. > ---- > ㅡ 이성태. <중산계급의 이기적 운동-사회주의자가 본 물산장려운동>. 동아일보 1923.3.20 그러나 당시 조선의 공업은 대부분 기계화되지 않은 수공업이었기 때문에 생산성과 공급력이 크게 덜하였다. 그래서 물산장려운동 시작 이후 수요만이 늘어나자 공급자들은 생산을 늘리는 대신에 그냥 가격만 올려서 국산물품 가격이 폭등하였고 결과적으로 국내 자본가와 상인만 이득을 보게 되었다. 때문에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은 '''"우리는 외국 사치품 같은 거 쓴 적 없는데 이 운동 때문에 오히려 국산품 값이 오른다??"'''라고 비판하였다. 이쪽 계열의 주장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면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와 '우린 이미 물산장려파다' 정도다. 전자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나오던 말이다. 일본인 자본이든 조선인 자본이든 결국 똑같이 농민들을 수탈하는 [[부르주아]]라는 것. 그리고 후자는 국산 기업이 만든 고무신 신을 것도 없이 이전부터 그냥 짚신 꼬아서 직접 만드는 등 이미 국산 임노동의 재화는 소비되고 있다는 것.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웬만한 물건들은 직접 만들어서 사용했는데 술은 직접 술 담가서 마시고 신발도 직접 짚신 만들어서 신었다. 당연히 이들 눈에는 그저 자본가를 위한 정책으로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산미증식계획]]으로 인해 일본 본토로의 쌀 이출이 증가하여 지주층이 흥했는데 이 지주층 중 대다수가 [[일본인]] 아니면 [[조선인]] 부호들이었다. 지주층이 산미증식계획으로 쌓아 놓은 돈으로 [[회사]]를 세웠고 [[관세]]가 철폐되고 경쟁이 심화되니까 조선인 기업이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운동을 벌인 것인데 이 운동의 중추가 [[민족주의]] 계열이라지만 참가원 중 대다수가 일제와의 타협을 추구했고 결국 1920년대 후반에는 민중의 외면을 받으면서 쇠퇴했다. 왜냐하면 민중들은 이미 국산품마저 살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이용 경제사 만화인 《아하! 그땐 이런 경제생활을 했군요》에서도 언급된다. 80% 이상이 국산이든 일제건 소비할 능력이 전무한 가난한 소작농이나 노동자들인데 자신들이 무슨 돈이 있냐며 피로에 쩌든 상태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그나마 이어진 명맥도 [[조선총독부]]의 간섭으로 인해 끊겨 버렸다. 부정적인 면이 많아 한계가 드러나는 [[독립운동]]이었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좌우합작운동]]의 영향으로 조선물산장려회와 [[사회주의]] 청년단체 서울청년회와 결합하여 '조선민흥회'가 만들어졌고 이 조선민흥회가 사회주의 단체장 모임인 '정우회'와 결합하여 1920년대 한국 독립운동 최대의 단체인 '''[[신간회]]'''가 결성된 뿌리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