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영전쟁 (문단 편집) === 지상전 === [[미합중국 육군]]은 전쟁 초기에는 현재의 [[토론토]]인 [[요크]]도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등 여러 [[도시]]에서 승승장구했다. 이는 영국이 미국 본토까지 수천 km가 떨어져 있는 대서양을 건너야 했기 때문이었고 게다가 나폴레옹 전쟁에서 겨우 이기며 한숨 돌린 수준이라 미국과 비교해 더욱 지쳤으면 지쳤지 그렇게 여유가 많은 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위에서 언급한 점들 때문에 서서히 발목을 잡혀 영국령 캐나다의 중심도시인 [[몬트리올]] 점령에 실패했다. 그 이유도 걸작인 게 4,500명 중 1천명은 국경 진군을 거부했고, 나머지 병력도 방어군의 [[허세]]에 공격을 포기했다. 거기다가 캐나다의 프랑스계를 포섭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프랑스계는 '''본국의 [[나폴레옹]] 체제에도 반대하며 [[부르봉 왕조]]를 지지하던 [[가톨릭]]-[[왕당파]] 성향이었기에''' 당연히 [[청교도]] 세력권의 [[미군]]을 반겨주지 않았고 미군은 캐나다 점령을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영국은 나폴레옹이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하자 병력을 아메리카로 돌릴 여유가 생겼고 나중에는 블래든스버그 전투에서 [[레드 코트]]들이 [[미 육군]]을 격파한 후 무방비 상태에 놓인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기습해 불태워 버렸다. 독립 이후 '''미국의 [[수도(행정구역)|수도]]가 [[외국]] 군대에게 점령당했던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미국은 [[백악관]]과 [[미국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여러 관청이 불타는 수모를 겪었다. 이때 [[제임스 매디슨|매디슨]] [[미국 대통령]]의 아내 돌리 매디슨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와 기밀 서류를 안고 [[영국 육군]]이 백악관에 도달하기 직전에 급히 탈출했다. 영국군은 수도를 점령했으니 전쟁도 끝나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미국은 각 [[미국/주|주]]들이 거의 독립적인 [[국가]] 수준이었고 수도가 점령당해도 자기 고장만 안전하면 괜찮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패배감도 느끼지 않았고 [[워싱턴 D.C.]]를 수복하기 위한 마땅한 반격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영국군 내부에서는 길어지는 전쟁에 불만이 폭주하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서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상태라 전쟁이 점점 더 길어지자 '''그냥 없던 걸로 하자'''는 내용의 [[겐트]]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당시 [[교통]]과 [[통신]] 사정상, 실제 [[전투]]는 조약 체결 뒤로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전투가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스 전투]]인데 [[루이지애나]]에 [[상륙]]하려 한 [[영국군]]을 상대로 [[미군]]이 맞선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앤드루 잭슨]]이 이끄는 미 육군은 단 '''62명'''(혹은 83명)의 사상자가 나온 반면 영국 육군은 무려 '''2,034명'''[* 이중 사망자는 285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다만 수치는 자료마다 좀 차이가 있다. 당장 항목만 봐도...] 이는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물을 끼고 [[대포]]를 보호할 방벽 등을 쌓으며 수비적 위치에서 기다리는 미군에 비해 이를 넘을 장작단과 [[사다리]] 등을 제대로 챙기지 않고 공격한 영국군의 실책, 그리고 측면 포대 점령이 늦춰진 것이(=측면 포대들이 열심히 말뚝딜을 퍼부은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과로 앤드루 잭슨은 미국의 전쟁영웅으로 부상했고, 후일 대통령이 되는 기반을 닦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