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승호 (문단 편집) == 생애 == 1830년(순조 30년) 판돈형부사를 지낸 [[민치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와 형이 있었는데 누나는 [[흥선대원군]]의 아내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며 형은 민태호(閔泰鎬)이다. 아래로는 남동생 [[민겸호]]와 여동생이 있었다. 이후 1861년(철종 12년)에 11촌 아저씨이자 [[명성황후]]의 생부인 [[민치록]]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양]]되었다. 이에 따라 명성황후의 양오빠가 되었다. 1864년(고종 1년) 중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왕이 된 고종의 휘하 [[관료]]로 입문하게 되었고 1866년(고종 3년)에 양누이인 명성황후가 고종의 [[왕비]]가 되면서 이조참의를 지냈다. 이 때 고종의 입장에선 외삼촌이 처남이 된 셈이다. 이후 호조참판,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 국면에서는 친동생인 [[민겸호]], 친척동생인 [[민태호(조선)|민태호]][* 민승호의 형인 민태호(閔泰鎬)가 아니라 민치삼의 아들이자 동명이인인 민태호(閔台鎬)이다. 이 사람의 아들인 [[민영익]]이 이후 명성황후 친정의 대를 이을 민승호의 양자로 갔으며 딸은 명성황후의 며느리가 되니 바로 [[순명효황후]]이다. 여러모로 민승호 및 명성황후와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등과 함께 명성황후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며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되었을 때는 명성황후에게 공로를 인정받아 [[민(성씨)|민씨]] 족당의 수령이 되었다. >'''[[운현궁#s-4|"운현궁…"]]''' >---- >― 민승호의 유언[* 운현궁은 당시 '''[[흥선대원군]]'''이 살던 장소이다.] 그러나 [[1875년]] [[1월 5일]], 자택에 있던 중 한 [[수령]]이 보낸 [[선물]]을 받게 되면서 선물을 개봉하려는 중 [[민승호 암살 사건|폭탄이 터져서 그 자리에서 숨졌다.]] 동시에 일가족도 모두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이때 그의 양어머니 이씨와 아들도 함께 사망했는데 만약 이 폭살의 배후 조종자가 흥선대원군이 맞다면 흥선대원군은 자기 처남과 [[사부인]]을 죽인 셈이 된다. 폭사 이후 고종으로부터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민승호의 조카 [[민영환]]의 시호도 민승호와 같은 '충정공'이다. 일반적으로 '민충정공'이라고 지칭하면 주로 민영환을 뜻하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