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누아투 (문단 편집) == 역사 == [include(틀:오세아니아의 역사)] 4000년 전에 멜라네시아인이 이주해 왔으며 1606년 [[스페인인]] 페드루 페르난데스 지 케이로스가 이 섬에 도착해 '라 아우스트랄리아 델 에스피리투 산토(La Australia del Espirito Santo)' 라는 길고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다[* 성령의 (espiritu santo) 남쪽 땅 (australia)라는 뜻]. 그 뒤 1774년 [[제임스 쿡]]이 이곳을 [[스코틀랜드]]의 헤브리디스 제도의 이름을 따서 '[[뉴헤브리디스 제도]]'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다가 1825년 [[에로망가섬]]에서 백단향이 발견되었고 서양 열강들이 바누아투를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바누아투를 놓고 경쟁했으나 결국 [[뉴헤브리디스 제도|공동 통치령]]을 설치해 서로 함께 통치하지는 결정을 내렸다. 두 나라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이곳을 관리했는데, 이것은 아주 드문 식민지 행정 정책이었다. 그 뒤 유행성 감기, 홍역과 같은 유럽에서 온 질병으로 원주민의 10분의 1이 사망했고 1920년대까지 농장에서 일할 노동자를 확보하기 위해 노예무역이 행해졌다. 전통적으로 바누아투에서는 토지를 살 수 없었지만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멋대로 해변 근처의 농장을 소유했다. 이렇게 생긴 갈등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40년대부터 정부를 세우자는 운동이 있었고 1960년에는 유럽인이 섬 내륙의 농장까지 가지려고 하자 바누아투 국민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적인 정치 저항 운동(나그리아멜 운동)을 벌였다. 이 결과 바누아아쿠당의 주도로 1980년 독립하였다. 참고로 바누아투의 독립을 마지막으로 수백 년동안 이어져 온 [[프랑스 식민제국]]은 해체되었다. 그 후 정부는 지나친 외국화를 막기 위해 전통적인 멜라네시아 토지법을 헌법의 기초로 삼았으나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1990년대에는 정부가 여러 차례 바뀌었고, 교체 시도 또한 자주 일어났다. 친프랑스계와 친영계의 대립이 있다고 한다. [[월터 리니]]를 포함한 친소파 성향의 멜라네시아 사회주의[* 사회주의의 한 종류였고,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멜라네시아 사회주의 참고.[[https://en.wikipedia.org/wiki/Melanesian_socialism|#]]]자들의 정당인 바누아투인들의 당이 집권기간 내내 압승을 거두웠고, 친소정책을 펼쳤으나 1990년대 초반에 당이 분열되면서 다당제가 되었다. 바누아투 정부가 2030년까지 100%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기로 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3375006?sid=10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