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늘구멍 (문단 편집) === 오역 주장과 반박 === 굉장히 극단적인 표현이라 일부에서는 [[오역]]이라고 주장하는 등 이 대목을 논파하려는 시도가 빈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구원과 가진 자의 봉사와 자선을 중요시하는 신약성경이지만 특히 '''이 구절은 직접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기독교의 구원 대상인가)'''를 알려주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길드와 대항해 시대를 전후하여 수많은 부를 축적했던 옛 부자들은 이 대목을 굉장히 두려워했다. *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라는 주장 대표적인 오역 주장으로는, [[아람어]]에서 [[밧줄]]을 '감타(gamta)', 낙타를 '가믈라(gamla)'라고 했는데, 이를 [[그리스어]]로 받아 쓰는 과정에서 복음의 서술자가 착각했다는 것. 즉, 원래는 "낙타가 아니라 밧줄을 구멍에 통과시키는 것이 어렵다고 하신 거였다." 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서기 4세기경부터 꾸준하게 제기되었다. [[https://hermeneutics.stackexchange.com/questions/43795/is-there-a-greek-or-aramaic-word-for-rope-that-is-similar-to-the-word-for-cam|#]] 이렇게 해석하면 낙타를 바늘귀에 넣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지만, 밧줄은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굵기가 천차만별이니 단지 '어렵지만 해볼 만한 일'이므로 상대적으로 그 난이도가 경감되는 꼴이다. * 실제 '바늘 구멍'이 아니라 《바늘 구멍》 이라는 이름의 고유명사였다는 주장 다른 설로는 [[예루살렘]]에 바늘구멍이라는 [[별명]]의 좁은 성문이 있었는데, 그 문으로는 낙타가 지나가려면 짐을 다 내리고도 구부정하게 구부려야, 심지어 무릎을 꿇어야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통과하기 어려운 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주장한 학설로 알려져 있는데, 근대 이후 부르주아 시민계급에 영합해서, 부지런히 일해 성공한 소위 '선한 부자'들을 옹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청교도들이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위의 오역 주장들은 모두 근거 없는 억측에 불과하다. >속담상 가장 큰 동물과 가장 작은 구멍에 관한 이 말씀을 한번 듣고 나면, 누구든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선명한 대비 때문만이 아니다. 한 치의 착오도 없는 강렬함 때문이다. 물론 이 말씀은, 부자들은 모두 100퍼센트 원칙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말씀은 통계학적인 정확성에 관심이 없다. 이 말씀은 인간을 깜짝 놀라게 하고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고 마음을 부수고 철벽 같은 인간의 무관심을 깨뜨리려는 의도를 지녔다. '''이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지는, 중세 신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바늘구멍'이라 불리는 좁은 성문이 있었다고 주장한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이 지닌 충격을 완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문은 없었다. 그것은 지어 낸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8세기 한 아일랜드 수사의 환상이 낳은 결과였다.'''[* (책 속 주석) [[https://en.wikipedia.org/wiki/Ulrich_Luz|Ulrich Luz]], ''Das Evangelium nach Matthäus''.3. Teilband(EKK I/3), Zürich/Neukirchen-Vluyn 1997,128 각주 59 참조.] >---- >[[https://en.wikipedia.org/wiki/Gerhard_Lohfink|게르하르트 로핑크{{{-2 (Gerhard Lohfink)}}}]], [[http://www.yes24.com/Product/Goods/20202626|《예수 마음 코칭 ㅡ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 원제: ''[[https://www.amazon.de/Jesus-von-Nazaret-Was-wollte/dp/345134095X|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 김혁태 옮김, 184쪽 우선 바늘구멍을 '작은 성문'으로 독해하는 건 8세기에 생겨난 낭설에 불과하다. 또한 최상단의 그리스어 발췌에서 보듯, 극도로 발달한 본문비평의 결과물인 Nestle-Aland 비평본에서도 여전히 '밧줄'이 아닌 '낙타'{{{-2 (kamēlon)}}}로 표기하고 있다. 애당초 독자의 마음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본문을 이해하기 쉬운 단어로 대체하는 건 오늘날의 본문비평에서 피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밧줄설'은 원문이 충격적이라는 것 외에 그 어떤 근거도 없기에, 본문비평에서 피하고자 하는 바로 그 케이스에 정확히 부합한다. 오역이라는 주장에는 '오역일 것 같다'는 공허한 심증 외에 어떠한 근거도 없으며, 비유대상의 과장을 주장하는 견해도 아래와 같은 유사 사례들에 의해 충분히 반박 가능하다. 당대의 많은 문언에서 '코끼리와 팔뚝', '메뚜기와 코끼리', '바늘과 소', '하루살이와 낙타'와 같은 이질적인 대상을 비교하는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다섯 마리 코끼리를 한 쪽 팔 아래 숨기는 게 더 쉬울 것이다. (그리스 속담) >한 마리 메뚜기가 코끼리를 낳는 게 더 쉬울 것이다. (로마 속담) >눈먼 이끔이들, 그대들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구나! (마태 23:24) 예수의 이 발언은 당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충격적인 발언이었음은 분명하다. 공관복음서 셋에서 모두, 예수의 해당 발언 다음에 사람들이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2 (마르코 10장 26절, 공동번역)}}}[* 병행구절 - 마태오 19장 25절; 루가 18장 26절]라고 의아해한 점에서 이 점은 분명해진다. 더군다나 여기에 대한 예수의 대답 또한 '애당초 충격을 주려고 쓴 비유'임을 보여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