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울로 (문단 편집) == 평가와 오해 == 초기 그리스도교의 확산에 기여하고 그리스도교의 체계적인 사상을 수립한 바울로였지만, 생전에도, 그리고 사후 수천 년이 이르도록 갖가지 논쟁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바울로는 사후에 그리스도교의 중요 인물로서 존경을 받았지만,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논쟁의 수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바울로와 성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을 받은 마르틴 루터는, 바울로 서간에서 [[의인(구원론)|의인론]]과 같은 종교개혁 사상의 원천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바울로 신학 및 개신교 신학을 "온갖 악행을 다 해도 믿음만 있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라는 식으로 엉뚱하게 해석하는 독자들이 있지만[* 실제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자유인답게 사십시오. 그러나 악을 행하는 구실로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섬기는 종입니다 (베드로1서 2장 16절).",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로마서 6장 15절)."을 생각해 보길 권한다.] 바울로도 개신교도 그런 식의 사고와는 거리가 있다.[* 루터가 신약에서 야고보서를 비하하면서까지 바울로 신학을 편향적으로 읽는 경향은 있었지만, 일단 야고보서에 명시적으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야고 2장 26절)라고 적혀있으며, 가톨릭과 개신교의 의화(칭의)론은 차이가 매우 미묘하다. 오히려 가톨릭과 루터교(+감리교)의 공동 선언을 보면, 문외한은 "도대체 이 둘이 무슨 차이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공통점이 많다고 느낄 것이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catholicchurch&no=29531|가톨릭 루터교 공동선언(+이후 감리교에서도 참여)]],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catholicchurch&no=29533|가톨릭 루터교 공동선언 부록]]] 비록 특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주석에 "종파 간의 신학적인 논쟁이 개입됨으로써 해석상 견해의 차이도 더욱 크게 벌어지고, 또 다른 문제들도 일어나고 확대됨으로써 바울로의 신학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주고 있"[* 이영헌 《로마서 강해》, 11쪽]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에서 바울로의 위상은 공통적으로 확고하다. 그는 굉장히 높은 그리스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신학을 정리한 최초의 인물이다. 수 천년 동안 여러 가지로 서양 사상사에 영향을 크게 끼친 인물답게 갖가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당시 바울로의 사도성은 매우 크게 수용되었다. 사도 바울로는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 [[예수의 형제 야고보]] 등을 만나서 그들에게 자신의 신적 권위를 인정받고, 때로는 그들의 잘못을 대담하게 훈계하기도 했으며, 그의 서신들은 여러 교회에서 읽혀지며 대량으로 필사하곤 했는데, 이는 바울로에 대한 인식이 매우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후대의 확고한 위상에도 불구하고, 생전의 바울로는 자신의 신학적 정당성을 설득해야 했고, '사도'라는 칭호가 거부되기도 했다. 사도행전에서는 첫 머리에서 사도의 조건을 나름대로 정의하는데, 이 조건에 따르면 바울로는 도저히 사도라 할 수가 없다.[* 루가 복음·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의 조건을 매우 엄밀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아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울로가 루가에게는 여느 사도들처럼 진짜배기 사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도는 열둘이니, 곧 세례자 요한의 세례부터 예수 부활까지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들이다(1,21-22 참조). 루가는 사도 칭호를 이 열두 사람에게 국한하기 때문에, 바울로에게는 사도 칭호 부여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루가가 바울로와 바르나바를 사도로 칭하는 경우가 한 번 있는데(14,4.14), 사도 칭호를 좀 헐값에 내주었다고 하겠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사도들, 즉 교회가 선교 과업을 위해 가려내어 파견한 "사자들"(13,2-3), 안티오키아 그리스도인들의 사자들이다. >----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 분도출판사, 2008, 467-468p >사도 개념을 폭넓게 이해·사용하는 경우 ―예컨대 루카 복음서 11,49나 바르나바와 바오로(순서 주목!)를 사도로 지칭하는 사도행전 14,14[* (책 속 주석) 사도행전 14,4 참조. SCHNEIDER(''Apg'' I 228)는 14,14에서 사도 칭호가 없는 서방 텍스트의 '더 어려운 이문(異文)'을 우대한다.] ― 는 아주 드물다. 열두 사람 사도직이라는 강령적 의미에서는 바오로도 당연히 사도일 수 없다. 열두 사도는 바오로의 활동에 앞서 존재하는 일종의 제도다. 열두 사도는 사도회의와 거기서 내려진 결정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언급되는데(사도 15,22-23; 16,4), 바로 이 대목 이후에는 오로지 바오로의 선교 활동만 보도된다.[* (책 속 주석) 사도행전 18,24-28에 삽입된 아폴로의 활동에 관한 짧은 보도는 전적으로 바오로에게 정향되어 있다.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때 바오로는 한 명의 사도도 만나지 못하고 (주님의 아우) 야고보만 만난다(21,18).] 열두 사도의 활동 장소는 예루살렘이다. 여기서 그들은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고(4,33; 참조: 2,43),교회 지도 직무를 맡았다(4,35 이하 5,2 등). 또한 필리포스의 선교 활동을 확인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냈다(8,14).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갑자기 들이닥친 박해가 그리스도인들을 그 도성에서 쫓아냈으나, 사도들은 예외였다(8,1). 사도들은 그곳에 계속 남았다. 베드로는 리따와 야포의 교회들을 방문하고(9,32.43), 이방인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를 최초로 교회에 받아들였다(10,1-48). 이 일은 한편으로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적극적 선교 결정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15,7-11). 예루살렘은, 그러니까 루카 이부작의 전체 구도에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장소일뿐더러, 열두 사도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그들의 특출한 대표자다. 그는 그리스도교 최초의 설교를 하고(2,14 이하)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을 방문하여, 성령에 부추겨져 이방인을 최초로 교회에 받아들인다. 갈라티아서 2,7.9에 따르면 루카는 사도회의에서 확증된, 베드로에게는 유다인 선교를 그리고 바오로에게는 이방인 선교를 할당한 결정을 알고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사도행전에서 이 결정은 베드로(그리고 다른 사도들)는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활동하고, 바오로는 땅끝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사도 1,8 참조). >사도행전의 바오로상{{{-2 像}}}은 양면적이다. 한편 바오로는 열두 사도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 이 책 둘째 부분에서는 열두 사도의 과업을 이방인 지역에서 속행하는 권위 있는 증인이 된다. 물론 바오로상의 좀 더 상세한 규정에는 논란이 많다. 사도행전의 묘사는 저술 당시 교회 내의 분규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연구 경향이 있다. 이단적·영지주의적 동아리들이 바오로를 빙자하고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그의 자유와 독자성을 끌어댔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카는 이에 맞서 바오로를 대교회에 맞춰 넣으려는, 요컨대 길들이려는 목적으로 사도행전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책 속 주석)참조: G. GLEIN, ''Die Zwölf Apostel''(FRLANT 77) (Göttingen 1961) 특히 11-188: J. ROLLOF,''Apostolat ― Verkündigung ― Kirche''(Gütersloh 1965) 199-211; C,BURCHARD, ''Der dreizehnte Zeuge'' (FRLANT 103) (Göttingen 1970); G.LÜDEMANN, ''Paulus, der Heidenapostel'' I (FRLANT 123) (Göttingen 1980); K. KERTELGE (Hrsg.), ''Paulus, in den ntl. Spätschriften'' (QD 89) (Freiburg 1981) 중 P.-G. MÜLLER(157-201)와 K. LÖNING(202-234)의 논문.] 이 역사적 배경의 재구성은 매우 가정{{{-2 假定}}}적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신학적 관심사들이다. 또한 루카가 바오로 사후 약 30년이 지난 자기 시대 교회의 바오로상에 부합하는 바오로의 모습을 많이 전해 주고 있음을 셈에 넣어야 할 것이다. 바오로 활동의 방사력{{{-2 放射力}}}은 과장되어 있다. 바오로는 총독과 임금들 면전의 탁월한 연설가(사도 24-26), 대단한 이적가(19,11-12), 아레오파고스에 등장하고 그 옛날 소크라테스처럼 아테네 아고라에서 철학자들과 논전을 벌이는 철학자로 나타난다(17,16-34). 바오로는 시종일관 그리스도인 2세대 사람으로, 그러나 사도들의 전승을 계속 교회에 전해 주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사울/바오로가 열두 사도에게 결부되어 있음은 두 차례 예루살렘 방문을 토해 표현된다: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었다"(9,28; 참조: 11,30; 12,25).[* (책 속 주석)갈라티아서 1,18-19에서는 바오로가 사도회의 전에 한 차례만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한다.] 세 번째 방문의 목적인 사도회의에 바오로는 물론 참석했지만, 중요한 결정을 한 이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다: "그때에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 결정하였다"(15,22). 또한 바오로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 교회(15,2-3)뿐 아니라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15,22)의 사절 역할도 했음을 유념해야 한다. 부활화신 그리스도에 의해 종과 증인으로(26,16) 그리고 '이민족들의 빛'으로(13,47) 세워진 바오로는,교회일치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사도들과의 결속을 통해 자기 교회들에 보증한다. 역사상 바오로에게는 복음의 일치가 확실히 중요한 관심사였는데(참조: 갈라 2,1-2; 1코린 15,11), 루카는 자신의 바오로상에서 독자성과 자주성을 많이 깎아 냈다. 루카는 자기 교회들(예전 바오로 교회들의 영향권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이 예루살렘이라는 원천에 정향되어 있는 질서로서 구상된 교회일치를 받아들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 >-'루카계 문헌의 신학적 구상',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분도출판사, 2014, 293-295p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리(도그마) 상에서 예수는 부활했으며, 승천을 하여 지상에서 모습은 감추었지만 그 영향력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얼마든지 지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나타나는 것도 가능하다. 따라서 바울로는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는 가능성을 그리스도교 교리 내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영적으로 예수를 직접 만나는 체험을 겪었다는 사람은 바울로 이후에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말한 것 때문에[* [[데살로니카서|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3장 8-10절] 돈 벌 능력이 없는 약자들에게 가혹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기독교 우파]]에서 복지제도,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근거 구절로 인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문구는 주로 사회에 생산적인 공헌은 하지 않으면서 실제로 힘들게 일해서 재화를 생산하는 사람들을 착취해서 호의호식하는 특권계급과, 일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를 비판하는 데 사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일할 능력이 없어 일하지 못하는 약자를 박해하는데 사용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성경 본문에서는 일하지 않고 오히려 일만 벌이는 데살로니가 공동체 내의 경향을 비판하는 문맥에서 쓰였으며 아울러 그가 활동한 로마 제국 시대에는 현대보다도 훨씬 비생산적인 특권(귀족) 계급의 병폐가 심했고, 초기 그리스도교가 일종의 급진주의적 공동체 역할을 하면서 도시 빈민들 사이에서 급속히 세를 불려나갔음을 생각하면 이건 좀 지나치게 나간 비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종교를 반대하는 [[소련]]에서도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 구절을 원칙으로 써먹었다. 일부에서는 바울로가 예수의 가르침을 종교로 만들기 위해 고의적으로 왜곡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유명인으로 [[프리드리히 니체]], [[토마스 제퍼슨]], [[레프 톨스토이]]가 있고, 일부 [[이슬람]] 신학자들 또한 그렇게 주장해왔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내 [[이단|일부 급진]] [[자유주의 신학|진보파]](예: 문동환 목사)도 마찬가지라서, 그들은 바울로를 정통 사도가 아닌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한 사이비로 보는 경우도 있다.[[http://m.hani.co.kr/arti/society/religious/261573.html#csidx21c4e4c499748aebe05ded5d3052435|바울로가 로마가 예수 공동체를 왜곡시키기 위해 투입한 프락치라는 주장]][*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신(소설)|신]]에서도 누가 봐도 바울로를 모티브로 한 사람이 예수를 모티브로 한 혁명가가 '독수리' 제국에게 처형당한 후 자기가 그의 수제자라고 자칭하며 제국에 충성하라는 내용으로 교리를 왜곡해 퍼트려 그게 정통교리로 변질되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만약 바울로를 거짓 사도로 취급한다면, 신약성경 중 절반 가량이 위경으로 규정되어야 하며[* 바울로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입장에서 바울로 서간은 좋게 말해봤자 바울로 개인의 해설서에 지나지 않다고 본다는 얘기다.], 로마가 당시 이스라엘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결론이 나오므로 용납되기 어렵다. 바울로는 가말리엘의 수제자, 즉 당시 이스라엘의 온건 바리사이파의 수장의 수제자 급의 인물로 철저한 종교 엘리트 계층이었으며, 로마의 지배에 대해서 중도적 입장이었다. 이런 사람이 로마의 프락치라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로마에 종속되어 문화적 다양성을 상실하고, 폭동 등이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 게다가 [[루가 복음서]]를 쓴 [[루가]]가 쓴 [[사도행전]]에서도 바울로의 행적이 자주 언급되기 때문에 사도로서 바울로의 자격을 부정하기는 곤란하다. 사실 초기 교회 시대에도 바울로의 사도 자격에 대한 논란이 어느 정도 있었던 듯, 신약성경의 바울로 서신에서도 이를 의식한 내용(고전 9:1)이 언급되어 있다. 바울로가 예수를 '신격화'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지만,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생각이다. '신격화'와 관련해서는, 오히려 실상은 정반대이다. 후대의 세계공의회들이 그리스 철학적인 용어를 동원해가며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과 유일신론을 조화롭게 말하려고 애썼듯이, AD 1세기 그리스도교에서도 유일신론은 민감한 문제였고,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이 다신론으로 오해 받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있어서, '''바울로는 예수를 신격화하는 동기를 발명해내려는 축이 아니라 유일신론을 자극하는 일탈을 피해가려는 쪽이었다.''' >변모 이야기(마르 9,1-9)가 보여 주듯 시나이 동기는 유다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의 중심을 차지하고 여기에 수집된 일련의 표상들이 바오로 서간(1테살 4,13~17; 2코린 3장; 로마 10,6~7)에도 나타난다. 물론 이 소재들은 유다계 그리스도교적 표상의 언어로 표출된다. 그것은 단순한 상상의 언어가 아니라 현실과 함께 현실 너머의 것을 번역하기 위해 히브리적인 방식의 상징과 이미지들로 반죽된 언어인 것이다. 바오로는 이 단편적인 소재들을 수용하여 재편성하고 어느정도 순화시킴으로써 유일신 신앙을 자극할 수 있는 일탈을 피해갔다. 사도는 흔히 말하듯 예수를 신격화하는 동기를 발명해 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우상화의 우를 범하지 않으면서 희랍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최대한 도움을 주기 위하여 초대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교리 교수 내용을 유다·희랍계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https://bundobook.co.kr/goods/view?no=6090|《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석학적 그리스도론》]], 백운철 옮김(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52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