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근혜/비판 (문단 편집) ==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 == >'''"미숙한 권력이 오만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사람은 잘 알려진 보수논객 중 하나다. 보수논객한테서조차 이런 평가를 받았으니 [[박근혜 정부]]가 얼마나 최악인지 알 수 있다. 전원책 항목 참조에도 알 수 있듯이 전원책은 성역 없는 비판으로 유명하다. 보수 이념에 맞지 않는 정당이라고 새누리당을 맹비판해왔다. 전원책은 이후 [[자유한국당]]에 대해서도 가감 없는 비판을 이어 갔다.] >---- >- [[전원책]] [[박근혜]]의 임기 중 성과들은 전부 전임 대통령들([[노무현]], [[이명박]])이나 국회의원들에게 공이 있으며, [[박근혜]] 본인이 대통령 임기 동안 세운 업적은 단 하나도 없었다. [[박근혜]]는 업적이 전무한 것은 물론 임기 내내 물의만 일으킨 것도 모자라 최소한의 염치(廉恥)[*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이념과 사상에 따라 평가가 갈릴 항목이 몇 개 있을 뿐이지만, 그것들마저도 전임 대통령 [[이명박/평가|이명박이 차린 밥상]]에 [[박근혜]]는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었다. [[박근혜]]의 정책 대부분은 "[[박근혜]]가 아닌 비선실세 [[최순실]]이 본인의 사익 추구를 위해서, 혹은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뒤 주도한 정책이었으며, 대부분이 권력을 위해 보수층을 모으려는 [[포퓰리즘]]에 기반한 것이었거나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 정책들이다"라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제정된 긍정적인 내용의 법률들도 [[박근혜]]가 직접 주도한 것이 아니라 의회가 직접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발의하고 제정한 유형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 담뱃값 인상: * 한일 위안부 협상 타결 * 한미 원자력 협정 타결 * 전승절 70주년 기념 행사 참가와 사드 배치 * [[경제민주화]] * [[증세 없는 복지]] * '''[[개소리|부정 부패 비리 척결]]''' 그러나 [[2016년]] 10월, 초대형 정치 스캔들이자 권력 비리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동년 12월 9일에 가결되었다. 그리고 2017년 3월 10일 11시 21분경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을 [[헌법재판소]]가 공식적으로 만장일치로 인용하면서 [[박근혜]]는 그렇게 권좌에서 쫓겨났다. 게다가 2017년 3월 31일에는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구속(형사절차)|구속]] 수감까지 당했다. 당장 전임 대통령 [[이명박]]과 비교해 보아도 박근혜는 [[DNA]]부터 [[금수저]][* 박근혜는 [[10.26 사건]] 직후인 1980년에 [[압구정 현대아파트]] 몇 십 채는 살 만한 돈이던 6억 원을 [[전두환]]에게서 받았다. 2017년 현재 기준으로도 6억 원은 거금인데, 저 때는 헤아리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대치 은마아파트]] 분양가가 2,000만 원이던 시절인데, 은마아파트 30채면 2016년 기준 300억 원 정도다. 거기에 제부 [[신동욱(1968)|신동욱]]은 2016년 11월,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박정희가 사망하고 나서 최태민 목사가 [[박근령]]에게 200만 원 짜리 [[아파트]] 한 채를 얻어주었다고 한다. [[최태민]]은 이어 [[박지만]]에게도 아파트 한 채를 구해준 것으로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박정희의 비자금 6억 원 중에서 동생들의 아파트 2채 가격을 제외한 298채 가격을 언니인 박근혜가 가졌다고 한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이 시기에 [[박근혜]]와 [[최태민]]은 통장을 같이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증언하였다는 것이다.][* 박근혜를 제외하고 그나마 금수저 출신인 대통령이라면 당시 [[거제시|거제군]]의 지역 [[토호]]의 아들이었던 [[김영삼]] 대통령(아버지 김홍조가 [[멸치]] 어장과 선단을 소유한 지역 거부였다.) 정도인데, 그 역시 초선의원 시절 선거 운동을 할때라면 몰라도 이후에는 순전히 본인의 힘으로 모든 것을 개척한 것이다. 물론 김영삼 대통령 역시 측근과 [[차남]] [[김현철(1959)|김현철]] 등의 친인척이 비리를 저지른 적은 있었지만, 그 자신은 청렴한 사람이었다는 평가에는 이견이 없다.]에, 조직의 맨 아래에서 일해보는 등 제대로 된 사회적 경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육군]] [[소위]]로 임관해서 군 조직의 최말단에 위치한 조직의 장인 [[소대장]]으로 시작해서 [[장성급 장교|장성]]까지 올라갔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군]] 소위 출신이긴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육군 현역병으로 입대하여 만기전역했다. 전역 당시의 계급이 상병이었는데, 당시에는 [[베트남]] 파병으로 조기 진급한 병장들이 너무 많아서 병장 TO가 없어 진급을 못했을 뿐, 노무현은 분명히 만기 전역을 했다. 게다가 [[가난]]에다가 '''[[고졸]]'''이라서 [[사법시험]] 준비 과정도 매우 파란만장했고(공사장 등에서 힘들게 [[노가다]]를 하면서 책값을 벌어 고시 준비를 했다고 한다), 합격한 뒤에도 본인을 괴롭히는 기득권 세력들에게 학력 등을 꼬투리 잡혀 집요한 공격을 온몸으로 받았다. 1940년대생으로서 고졸이 결코 낮은 학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일:external/www.ohmynews.com/020411_ysku_05.jpg|그렇게 엘리트들이 옹졸하게 노무현을 공격한 것이다.]] 물론 노무현 본인은 그것을 자기 실력으로 모두 극복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더불어 자수성가의 대표적인 사례로 통하는 [[이명박]] 대통령은 시장 바닥 행상으로 시작해 아예 [[현대건설]] 말단 [[사원(직위)|사원]]으로 들어가서 까마득한 선배들과 함께 현장에서 뛰어다녔다. [[윤석열]] 대통령은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평검사로 시작해서 검찰총장까지 올라갔다.][* 영애/영식 시절부터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대통령의 영식 [[노건호]]는 [[LG전자]]에 말단 사원으로 들어가서 선배들과 일선에서 움직였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http://www.vop.co.kr/A00000891434.html|퇴사하지 않고]] 계속 본분을 지켰다. 훗날 퇴사하긴 했으나 (중국 유학을 위해 [[LG전자]] 중국법인에 입사했는데, 본사에서 퇴사하고 중국 법인으로 갔다는 말도 있으므로 정확하지는 않다), 아버지 노무현이 서거한 후 한참 지난 뒤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영애 노정연도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본분을 지키고 있다. 참고로 영식/영애는 영부인/영부군과 달리, 본인이 바라는 삶을 누릴 기회가 생긴다. [[영부인]]/영부군은 어차피 바로 청와대로 들어올 운명이기 때문에, 회사에서 영부인/영부군 기간을 무급 휴직으로 처리하고 퇴임 후 복직할 기회를 준다던지 하지 않는 한 원래 직장으로 돌아갈 여지가 적다.]을 하지도 않고,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역량을 증명한 이력[* [[이승만]] 대통령은 비록 독재와 학살을 비롯한 실책 때문에 말이 많지만,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했다는 사실만은 명확하며, [[일본 내막기]]를 저술하며 미국에서 위험분자로 낙인 찍히면서도 일제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게다가 취임 후 [[6.25 전쟁]] 땐 [[목포시]]에서 [[해군]] 경비정으로 간신히 철수하는 등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장면]] 총리는 1956년에 이승만의 측근인 [[이기붕]]을 누르고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가 이후 이기붕의 계획에 의해 김상붕에게 저격당하여 왼손에 총탄을 맞기도 했으며, [[4.19 혁명]]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는 뜻에서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1915년에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잠시 독립운동에 참여한 바 있으며, [[영국]] 유학 생활을 마친 후 귀국했을 때 [[조선총독부]] 등이 그에게 끈질기게 협조([[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는 것)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석왕사에서 은신하면서 끝내 거부했을뿐더러, 일제강점기 말에 [[민족말살정책]]이 실시되었을 때 본인이 속한 [[해평 윤씨]] 가문의 문중회의에서 가문 전체의 [[창씨개명]]을 결의한 뒤에도 혼자서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비록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반민족행위]]라는 점에서 흑역사이긴 하지만 [[만주군]] 시절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고, [[남조선로동당]] 시절 [[여수·순천 10.19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본인의 처세술 및 [[백선엽]]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며, 이후 [[대한민국 국군|한국군]] 소속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휴전을 1년 앞둔 1952년에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군부의 이승만 축출 시도에 가담하기도 했다.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도 장교일 때 [[베트남 전쟁|베트남으로 파견]]되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목숨을 걸고 독재 정권에게 항거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제명 파동]],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질산 테러]], 각목 사건, 가택 연금 같은 시련을 겪었으며,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인생 자체가 [[김대중 납치 사건|납치]]와 사형 선고 등을 비롯한 온갖 고난으로 얼룩졌다.(이 과정에서 장남 [[김홍일(1948)|김홍일]]도 고문을 당해 불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사후에도 보수 세력으로부터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부정한 공작과 거래를 자행했다느니, 북한에 일방적으로 퍼줬느니라는 [[흑색선전|마타도어]]에 지독하게 시달리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군부 정권의 탄압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하다못해 [[이명박]] 대통령도 [[6.3 항쟁]]의 주역 중 한 명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총장 시절 [[조국 사태]]에 대해 수사하던 중 [[문재인 정부]]의 지나친 견제에 시달렸으며, 정계 입문 직후에는 문재인 정부의 독선적인 정치에 항거했다. 박근혜는 당 대표로서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이는 순전히 [[박정희|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자신의 후광 이미지가 먹힌 결과물일 뿐이다. 대한민국 대통령들 중 이러한 이력이 없는 또 다른 대통령으로는 [[최규하]]가 있기는 하지만 재임기간이 1년도 채 안되므로 논외. [[문재인]] 또한 노무현의 후광으로 당선되었다는 이미지가 있긴 하지만 사법연수원 수료 이후 노무현과 함께 인권변호사로 힘들게 근무하고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는 이력이 있어 [[노무현|선배]] 덕 좀 봤다는 비평은 있을지언정 인권변호사 및 민주화운동가 이미지를 부정하는 관점은 없다.]도 없다. 그야말로 '''평생 동안 검증된 능력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스스로 바닥에서 올라온 적이 없다. 실제로 대통령직에 있을 때도 전세계 민주 국가들이 지닌 President가 아닌, 제왕적인 느낌의 대통령에 가까웠다.[* [[대통령]](大統領)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백성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최고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전제군주 같은 신분이나 지위를 뜻하는 단어지만, President는 이런 느낌과는 정반대로 '다른 사람보다 앞에 앉는 사람'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애초에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19세기 일본이 통령(부유층 자제 출신의 무사들을 통솔하는 [[에도 시대]]의 관직)에서 따와, 큰 나라인 미국을 예우한다며 大를 붙이고, [[1853년]] [[밀러드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친서 번역본에서 최초로 쓰인 게 시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때 처음 쓰였다.][* [[윤석열 토론회 손바닥 王자 논란]]이 왜 터졌는지만 봐도 이와 일맥상통하다.] 최소한 [[이명박]]의 경우에는 공도 있고 과도 있어 호불호가 갈리는 대통령 시절과는 별개로 [[서울특별시장]] 한정으론 역대 모든 시장을 통틀어 매우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1~2위권에 올려도 될 정도로 검증된 인물이다. 오죽하면 혹자는 [[박근혜]]의 등장과 몰락으로 전임 대통령의 업적이 [[재평가]]받고 전임 대통령들[* 특히 노무현과 이명박.]의 지지자를 더욱 늘린 것이 유일한 업적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사실 청와대에서는 2016년 12월, --[[http://www1.president.go.kr/policy/policy_result/result.php|박근혜정부 3년동안 성과]]--(삭제됨)라는 제목으로 경제 부흥, 창조 경제 육성 등을 중심으로 긍정적인 일면을 홍보하고 있으며, 249페이지 분량의 --[[http://www1.president.go.kr/ebrochure/outcome/|관련 문서]]--(삭제됨)를 홈페이지에 공개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에서 소개하는 주요 업적들은 다음과 같다. * 4대 개혁 추진으로 경제 재도약 기반 구축, 꾸준한 경제 민주화 * 창조경제의 성과 가시화 및 청년 일자리 창출 토대 마련 *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 완성으로 평생 사회 안전망 기틀 마련 * 튼튼한 안보와 원칙에 입각한 남북관계 재정립, 국익 우선 신뢰 외교로 국제적 위상 강화[* 대표적인 사례로 42년 만에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한일 위안부 협상]] 타결을 들고 있다. 다만 위안부 협상의 경우에도 논란이 많다.] * 부정부패와 비리 척결, 자유민주주의와 헌법 가치 수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통합진보당]] 해산. 하지만 역설적으로 [[박근혜]]의 탄핵을 받게 한 중대한 사유 중 하나가 헌법수호 의지가 없으며, 파면을 통해 얻는 헌법 수호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숟가락이나 얹었다'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다.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환수, 담뱃값 인상, THAAD 국내 도입, 전시작전권 연기 등을 업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에 대한 논란도 많이 있다. 자세한 것은 [[박근혜정부/평가#s-4|해당 문단]] 참고. 그리고 [[경제민주화|경제 민주화]]는 아예 폐기라도 해도 무방하다. [[박근혜]]의 공약이었던 경제 민주화를 설계한 이는 [[김종인]]이었다. 하지만 경제 민주화 공약을 사실상 파기 시켜버리자, 실망한 나머지 [[김종인]]은 이후 탈당했다. 이걸 수혈하겠다고 경제학자 출신의 [[최경환(1955)|최경환]]이 주도하는 경제 정책이었던 [[초이노믹스]]는 원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근혜노믹스 또는 창조노믹스라는 이름을 밀었다고 한 것이 공개되었다. 또한 일자리 창출은 역대 최악의 청년 실업 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색해진 의미다. 그리고 일자리 창출을 위함이랍시고 추진했던 4대 개혁 중 하나가 바로 '노동계 버전 유신 헌법'이라 불렸던 [[박근혜정부/노동개혁|노동개혁]]이다. 얼마나 악질적으로 불렸으면 별명이 '노동개'악(惡)'이다.[* 노동계 버전 [[유신헌법]], 전 국민 알바화, 전 국민 장그래화 등의 별명도 있었다.] 비정규직 사용 기간이 2년에서 4년으로 무려 두 배로 늘어난 것과 근로 시간이 줄어들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노동개혁 반대 서명을 시민 단체에서 자비 투표소를 구입해 투표한 결과, 96%가 반대했을 정도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맞불로 노동개혁 찬성 서명을 하기 시작했는데, 첫 서명자가 [[박근혜]]였다. 결국 이 노동개혁 법안은 [[2016년]] [[5월 19일]]에 모두 폐기되었다. 청와대에서는 진영 논리에 갇혀 법안 통과가 지지부진해졌다고 평했다. 그나마 [[문화가 있는 날]] 정도가 [[박근혜]]가 시행한 정책 중 매우 드물게 호평을 받았지만, 이마저도 [[박근혜]]가 제멋대로 휴일로 정한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로 정했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일부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이마저도 [[박근혜]] 본인은 당시 [[대한민국]] 여성의 평범한 삶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도 없으며, 딱히 양성평등에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유영하]]의 '여성의 사생활' 발언 등에서 여성 운동가들에게는 비판을 받기까지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여권 향상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보는 것도 힘들다. 오히려 퇴보시켰으면 시켰지.]이라는 점을 내세우기도 하나,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https://arca.live/b/headline/73928|후광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의견이 강세다. 원래부터 [[낙하산 인사]]일 뿐이었고, 그 정의([[박근혜/비판/자질|무능력]] + [[전두환|인맥빨]] + [[박근혜/개인처신 문제|낮은 인격 수준]] + [[졸부|돈빨]])를 모두 만족한다. [[낙하산 인사]]는 무능력과 인맥, 돈 문제 때문에 쓴소리를 듣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은 저 4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으므로, 정계 입문 시절부터 낙하산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 초기에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점은 분명히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박근혜가 아니라 다른 어떤 여성 정치인이었어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본인의 공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박근혜 정부]]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여권이 기존보다 더 퇴보되는 악영향만 낳았고, 앞으로 또다른 여성 대통령이 나올 여지를 가로막게 되었다. 하지만 [[박근혜]]는 앞서 말한 것처럼 긍정적으로 볼 만한 부분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옹호를 받아왔는데, 이런 꾸준했던 옹호의 이유는 보통 60대 이상 극보수층에게 많이 적용된다는 '[[박정희]]의 후광 효과 + 진보파에 대한 부정적 인식 + 감성적 지지 +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지부조화]] + [[콘크리트 지지층]] + 헌정 최초의 여성 대통령' 이라는 의미 등이 그 근거라고 지목되고 있다. 당연하게 이런 뚜렷한 근거도 없고 맹목적이기만 했던 옹호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같은 [[박근혜 정부]]의 [[가렴주구]]식 국정 운영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당장 [[새누리당]]의 친박 계열이 [[박근혜]]에게 이유 없는 무조건적인 지지와 선거 마케팅으로 삼는 황당한 짓까지 하는데도 견제가 먹히지 않았던 이유는 결국 30%에 달하는 콘크리트 지지층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후술되듯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로는 이런 꾸준한 옹호조차도 급속도로 사라져가는 추세이지만, 눈으로 뚜렷이 드러나는 각종 실책과 사회 문제들을 목격하면서도 눈과 귀를 막고 진영논리에만 열을 올리던 행태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정국이 거의 마비되는 대사단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 때문에 지지율이 4% 아래로 내려가 바닥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박근혜]]를 지지한다고 공개된 옹호자들과 여론 통계에 잡히지 않았을 뿐이지, 소수나마 존재한다고 추측되는 숨은 옹호자들, 즉 [[샤이 박근혜]]가 있다고 추정되는 상황이지만[* 다만 [[샤이 박근혜]]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그 규모가 있다고 해도 미미하며 국정 변환의 변수로는 거의 가망성이 없다.] 현재 이런 옹호 여론은 의미가 없어진 상태다. 그리고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예상보다 큰 표 차이로 가결되며, 오히려 [[새누리당]] 내 샤이 탄핵파, 샤이 반 [[박근혜]] 세력이 더 많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래서 농담 삼아 [[박근혜]]가 온 국민을 대통합시킨 업적이 있다고 네티즌들이 언급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문제로 인해 온 국민이 박근혜에게 하야하라고 대동단결한 상황을 비꼬아 말한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본인조차도 그게 진짜로 박근혜의 실정 때문이지, 업적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끊임없는 실정으로 인해 [[2016년]] [[12월 9일]]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대한민국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이로써 당일 오후 7시 3분을 기해 공식적으로 [[박근혜]]의 모든 권한 정지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27초,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만장일치로 탄핵이 인용되었다. 사실 이런 식의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 자체가 의미가 없게 된 것이, [[박근혜]]는 같은 당의 상당수 의원들은 물론이고 한때 지지자였던 前 친박들도 일부 돌아선[* 실제로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그 열렬한 [[박근혜]]의 팬이라 할 수 있는 두 지역인 [[부산광역시]]와 [[울산광역시]]마저 자유한국당에게 등을 돌리고 두 지역 모두 [[문재인]]이 승리했다. 본디 경상도 지역 전체가 보수 정당의 텃밭 지역인데, 그러한 곳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부산조차 박근혜를 계승한 [[홍준표]]를 버리고 문재인을 선택했다는 것은 엄청난 정치적 지각 변동이다. 물론 문재인이 부산 출신이라는 것과 20대 총선 이후로 더불어민주당이 PK 지역에 기반을 확대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결국 [[자유한국당]]은 '''[[대구광역시]] 이외의 모든 광역시에서 패배했다.''' 게다가 비영남권 특별/광역시(서울, 인천, 광주, 대전)에서는 '''읍/면/동 단위로 봐도 처참했다.''' 광주는 지역 특성상 원래부터 0곳이라고 쳐도, 서울에서는 13개 동(게다가 그 중 6곳은 강남, 2곳은 서초고 나머지 중에서 여의도동과 합참 및 국방부 소재지인 서빙고동이 있다.), 인천에서는 3개동(원도심의 2개동+용유동), 대전에서는 3개동(원도심의 1개동+농촌지역인 대청동, 기성동)에서만 승리했다.] 정말 답 없는 인물이었다. 물론 [[영화]], [[만화]]가 아니라 [[현실]]에서는 어지간히 못난 통치자라도 작은 업적 정도는 있게 마련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나 [[조선]]의 [[연산군]]은 초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왕이었고, [[선조(조선)|선조]]는 도덕성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능력은 좋은 편이었고 할아버지 선조보다 나쁜 평가를 받는 [[인조]]조차 의외로 재평가할 가치가 있었으며, 비교적 혼란한 시기였던 [[신라]] 하대의 왕들 중 일부는 현대에 들어서 재평가되고 있다. 쿠데타로 집권하고 대한민국 대통령 중 가장 민주적 정당성이 떨어졌던 [[전두환]]의 경우도 비록 그것이 박정희의 정책의 후광인 부분이 없었다고 보긴 힘들어도 수치상으로 좋은 경제 성장률, 문화 규제 해제등의 [[장점]]은 있었다. 문제는 박근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능력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너무나도 무능했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