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근혜/비판/자질 (문단 편집) == 소통 문제 == [[새누리당]] 인사들에게는 발신번호 표시제한 전화로 연락이 왔다.[* 나중에 이유가 밝혀졌는데, 어이없게도 [[박근혜]]는 [[최순실]] 등 일당들과 함께 [[대포폰]]을 쓰기 때문이었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소통하지 않는다든가, 만나거나 접근하기 어렵다든가 등의 경험들을 예로 들며 [[박근혜]]가 소통 능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사실 소통 능력이 부족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소통 하길 거부 하는것이 맞다고 봐야겠지만. 2004년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맡고 있던 박근혜와 함께 원내대표로 활동하였던 [[김덕룡]]은 박근혜가 소통이 안 되는 것을 넘어 "먹통"이라고 평가하면서, 당시 박근혜에게 "[[정수장학회]] 문제를 털고 넘어가야 한다"고 조언을 했지만 자신의 조언을 거부한 것은 물론 이후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또한 박근혜에게 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으며, 참모들조차 주요 현안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누구와 상의하는지 모른다고 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65492.html|출처]]. [[전여옥]] 전 의원이 밝힌 바에 의하면 박근혜는 당 대표 시절부터 대면보고를 좋아하지 않았고, 어쩌다 그런 자리가 마련되더라도 항상 아무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침묵하기만 하였다고 한다. 본래부터 회의를 싫어하고, 사람들과 토론하는 건 더 싫어하고 힘겨워하여, 자기 의견을 전혀 내지 않았다고 한다. 2008년 총선 직후엔 [[낙선]]하고 자기를 찾아온 친박 의원을 위로해주기는커녕, 40분간 친박계와 친박연대가 몇 명 됐는지만 떠들어댄 적도 있다고 한다. 저녁 6시 이후엔 완전히 연락이 두절되어, 최측근도 직접 연락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박근혜]]의 측근이라도 연락을 하려면 박근혜의 집에 있는 경비에게만 연락이 될 정도였는데, [[김선일(1970)|김선일]] 피랍 사건 당시 [[전여옥]] 전 의원이 열댓 번을 전화하고서 가까스로 박근혜와 통화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61836|#]]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이는 비슷해서 극단적으로 사람을 잘 만나지 않으며, 공무처리도 정말 알려지지 않는 측근이 아닌 이상 대통령과 직접 대화하거나 건의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전임 [[이명박]] 대통령이 국무총리실 비선을 통해 일으킨 민간인 사찰 사건과 달리, [[박근혜]] 대통령은 처음부터 수십 년 간 알고 지낸 몇몇 지인들, 즉 비선이 아니면 접근조차 어렵고... 모든 일을 극소수의 심복들을 통해 전달 받으려는 태도로 인해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을 불러왔다. 집권여당의 대표였던 김무성마저 대통령을 제대로 만나지 못 했다고 토로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예 그 이외의 사람들은 대통령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속칭 문고리 3인방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를 자초하게 된 것이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6060101070621076001|#]] 이쯤 되면 아예 불통 그 자체이다. 오죽하면 [[박근혜정부]] 경제라인이였던 '''[[김종인]]'''과 '''[[김광두]]''' 같은 주요 인사들이 "소통이 안 된다."고 이유를 들어 결별을 선언했을까? 정작 박근혜는 "내가 왜 소통이 안 되냐?"고 노발대발을 했다고 한다. 훗날 [[김종인]]은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대표로 추대되어 민주당의 승리를 이끌어냈고, [[김광두]]는 [[문재인 정부]] 대통령 직속 국가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을 2년 가까이 역임하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나서도 소통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그러한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김병준(정치인)|김병준]]을 총리로 지명한 개각이다. 사실 국회에서 거국중립내각에 대한 안이 나온 이후에도 한 번도 [[청와대]]는 관련 입장을 표명한 적이 없고, 국회 주요 의원들과 제대로 된 회의를 한 적이 없다. 그래도 국회는 내각과 관련한 협의를 계속 진행하였으나, 갑자기 아무런 상의도 없고, 심지어 여당 의원들조차 제대로 모르는 개각을 시도하였다. 이는 국회의 협상 테이블을 청와대가 걷어차 버린 꼴이 되었다. 야당은 물론 여당 내부에서도 개각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더 이상 청와대와 국회가 제대로 된 협의를 할 수 없다고 봐도 될 정도이며, 정국의 혼란만 더욱 가중 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심지어 이에 대한 해명을 한다고 3차례의 대국민 담화를 할 때도, 기자들의 질문을 하나도 받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고 들어갔다. 세계의 여러 지도자들의 예를 보면, [[버락 오바마]]는 기자들을 모아놓고 연설할 때는 꼭 기자회견을 한다. 같은 여성 지도자인 [[영국]]의 [[테레사 메이]]도 마찬가지다. 같은 [[한국인]] 지도자인 [[노태우]]의 경우만 해도 <[[국민과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국민들 중 지원자를 받아 같이 출연해서 대화했다. [[김영삼]] 때는 실시하지 않았다가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다시 만들어져 이때 실시한 <국민과의 대화>는 [[김대중 정부]] 내내 방송되었다. 김대중 퇴임 이후에도 [[노무현]] 역시 국민과의 대화에 출연하였고[* 그것이 확대되어 [[https://youtu.be/nNX11FigAMw|일본 국민과의 대화]] 등 주변국까지 확대되었다.], 상대 당 후임 대통령인 [[이명박]]도 <대통령과의 대화>로 제목만 변경한 같은 포맷의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각 방송 내용에 따라 논란이 된 바가 있긴 했어도 6공 하에 있던 대다수 대통령들이 국민과 소통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건 이어진 기조였지만, [[박근혜]]는 임기 중 한 번도 이런 프로그램을 추진하지 않았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의도치 않게 대박을 쳐서 국가적인 위상을 높여놨으니 한 번 정도는 초대해서 만찬을 할 법도 한데, 오히려 박근혜는 국정회의에서 한다는 말이 "강남스타일이 주목 받던데, 이런거 더 만들어보세요."가 끝.] 그러더니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한 2017년부터 매년 한 번씩은 프레스센터를 통으로 빌려서 신년기자회견을 갖고 본인이 직접 대답을 하는 식으로 소통을 진행하고 있으며, 2019년 11월에 국민과의 대화 프로그램이 귀신같이 부활하였다. 이렇듯 국가 지도자라면 항상 소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지도자 1명이 모든 시민들과는 일일이 소통할 수는 없으니 지도자의 생각을 대신 전해 줄 기자가 필요한 것이고, 간접적인 방식이라도 지도자의 의견을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기회가 바로 [[기자회견]]인 것이다. 6공 때 실시되는 [[국민과의 대화]]도 이러한 국정 운영의 기조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예를 들자면 1980년대 냉전 말기 [[미국]]을 통치했던 [[로널드 레이건]]은 취임 초인 1981년에 본인의 국정 철학을 알 수 있는 라디오 담화를 무려 7번이나 했고, 그 후에도 시민들을 위한 메시지를 많이 남겼다. 그 결과, 1984년 대선에서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상대 후보였던 민주당의 먼데일은 전체 선거인단 537석 중에서 고작 13석을 얻는다. 레이건이 일방적으로 승리한 선거이다. 그나마 레이건이 먼데일에게 승리하지 못한 지역과 인종은 영원한 야당 [[워싱턴 D.C.]]와 먼데일의 고향, [[포클랜드 전쟁]]에서 레이건이 [[영국]] 편을 들었기 때문에 그에 불만을 갖게 된 [[히스패닉]]들 뿐이었다.] 박근혜처럼 [[금수저]] 출신인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는 지역구 중의원(1963년부터 사망한 2000년까지 12선)부터 시작해 관방장관, 외무대신을 거쳐 총리가 되었는데, 경제와 상관없는 이력[* 오부치 총리는 원래 정치를 할 생각이 없었어서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입학해 본인이 좋아하는 영문학 공부에 몰두했었던 평범한 문학도였다. 그러나 졸업 후 아버지가 급사하여 황급히 아버지의 중의원 지역구를 승계하면서 우연히 정치판에 뛰어든 케이스였고, 정계 입문 후에도 순수 어문계열 전공자답게 경제보다는 정무 라인인 관방장관, 영어 전공을 살려 외무대신으로 활약했었다. 다만 전직 외무대신답게 한일 관계 개선에 기여하는 등 외교 안목은 뛰어났었다.] 때문에 가뜩이나 경기가 안 좋았던 당시 일본 국민들은 무슨 생각으로 (오부치를) 뽑았냐고 조롱하거나 식은 피자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식은 피자도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맛있다"라며 별명을 긍정적으로 수용했고, 소시민적인 이미지 어필과 국민들과 전화 통화까지 하는 등으로 소통 행보를 보여 취임 1년 만인 1999년 지지율 50%를 이뤄냈을 정도였다. [[뇌경색]]으로 급사하지만 않았더라면 5년 이상의 집권도 가능하다고 평가된 인물이다. 이렇게 시민과 소통하는 지도자는 정책의 찬반 여부와는 상관없이 큰 인기를 얻는 것이 정석이다.[* [[노무현]]은 퇴임 이후에도 소통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온갖 미디어믹스가 그의 모습을 조명할 정도로 여전히 인기가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비록 [[참여정부]]가 실패했다고 할지라도, 노무현의 소통 능력은 굉장히 좋은 모습으로 남았기 때문.] 만약 [[박근혜]]가 언론에서 사건을 터뜨렸을 때 재빨리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과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최소한 시민들이 직접 거리로 나와 탄핵을 요구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최순실|아무 공직도 맡지 않은 일개 민간인]]에게 국정을 사실상 맡겼다는 것 자체가 국기 문란 행위인 것은 맞다. 하지만 최소한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진정성 있게 사과했다면 콘크리트 지지층 및 [[새누리당]]은 "그래도 진정성 있는 모습은 좋지 않냐?"라고 옹호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지율이 한 자리 수가 나올 수도 없고, 시민들이 하야라는 극단적 상황을 요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여옥]]의 말마따나 박근혜는 국회의원 시절부터 소통에는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였고, [[우상호]]는 "그렇게 소통 안 되는 사람이 자기를 욕하는 건 귀신 같이 알아듣더라!"고 할 정도로 평소 의원들 사이에서도 소통이 그리 원활하지는 않았던 듯 하다. [[박근혜 정부]] 초반인 2013년 3월부터 2014년 7월까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을 지낸 [[유진룡]]은 [[http://news.nate.com/view/20161228n00509|"박근혜 대통령은 토론이 뭔지도 모른다"]]라고 밝혔다. 또한 [[대한민국 해양경찰청|해경]] 해체 문제를 놓고 "장관들의 의견도 안 들어보고 결정하냐?"고 반발하자, "어떻게 모든 사람들 말을 다 들어주냐?"고 되레 역정을 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안종범]] 전 수석의 검찰 진술에서 지시할 때도 전화로만 했으며, 수첩 읽는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01&aid=000899225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