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성용(기업인) (문단 편집) == 음악계 육성 후원 == [[범금호가]]가 '''한국의 [[메디치 가문|메디치]]'''라는 별칭을 얻게 된 데에는 문화예술, 특히 클래식 음악에 대한 박성용 회장의 애정과 관심, 파격적인 지원 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성용 회장은 그룹 경영권을 동생 [[박정구]] 회장에게 물려주고 명예회장이 된 후 [[금호문화재단]] 이사장직을 맡았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클래식 음악 영재를 후원하는 사업을 꾸준히 해왔다. 첫 수혜자는 피아니스트 [[손열음]]이었다. 이후 수많은 클래식 음악 유망주들이 박 회장과 금호그룹의 지원을 받았는데 박 회장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유망주로 직접 점찍고 지원을 결심한 마지막 유망주가 바로 한국인 최초의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였던 피아니스트 [[조성진(피아니스트)|조성진]]이다. 1997년 [[예술의 전당]] [[이사장]]직을 맡았고, 2003년 [[http://www.mecenat.or.kr|한국메세나협의회]] 제4대 회장을 맡았다. [[윤이상]]의 음악적 고향 [[통영]]에서 2002년부터 시작된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62040|통영국제음악제의 출범 당시 이사장을 맡아 적극 후원했다]]. 그 결과 통영국제음악제는 세계 음악계에서도 명성을 인정받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제가 되었다. 2000년 그룹 사옥을 회현동에서 신문로로[* 현 크레센도빌딩. [[대우건설]] 본사가 한동안 이 건물에 있었다.] 옮기려 할 때 "서울시내 한복판에도 제대로 된 실내악 연주회장이 있어야[* 금호빌딩 바로 뒤편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공연장 중 하나인 [[세종문화회관]]이 있다. 그러나 공연 애호가들은 물론 연주자들도 세종문화회관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공연장의 규모가 심각하게 큰데다 음향 보조 장치가 엉망이라서 관객이 듣기에 음질이 매우 불편하기 때문이다.] 한다"면서 실내악 전용 공연장의 설립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이 건물 3층에 '금호아트홀'을 만들었다.[* 이후 금호아트홀로도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그보다 더 작은 실내악 공연장을 하나 더 만들었는데 이것이 '문호아트홀'이다. '문호'는 그의 호다.] 이 금호아트홀에는 박 회장의 지정석까지 있었는데 별일이 없으면 이 공연장에서 열리는 연주회에 거의 매번 찾아왔다. 중앙 통로 바로 앞줄 왼쪽 블럭의 가장 오른쪽 통로 옆자리(G열 7번)가 그의 지정석이었다. 통상적인 관념으로 본다면 그다지 인기 있는 자리는 아니지만 통로 때문에 시야가 열려서 거기 앉으면 피아니스트의 손과 무대가 딱 보이므로 클래식 매니아에게는 꽤 좋은 자리이다.[* 다른 연주회와 달리 피아노 독주회 티켓 판매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팔리는 자리가 가운데에서 살짝 왼쪽으로 치우친 블럭의 자리다. 이유는 똑같이 피아노 연주자의 손과 무대를 보기 위해서다.] 덕분에 생전에는 매번 그 자리와 옆자리를 판매하지 않다가 연주회를 못 갈 것이 확실할 때만 뒤늦게 오픈하곤 했으며, 사후에도 그 좌석 뒤에 작은 기념 현판을 부착하고 공연장 로비에 그의 흉상을 세우기도 했였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본인이 공연장의 소유주임에도 단 한 번도 공짜로 공연을 보지 않았고 '''[[내돈내산|다른 관객과 똑같이 돈을 내고 표를 사서]]''' 지정석에 앉았다고 한다. 다만 그가 정열을 바쳤던 금호아트홀은 공연장 입주 건물이 도이치자산운용에 매각되면서 임차 재계약에 실패했고 결국 2019년 4월 30일의 연주를 마지막으로 폐관되었다.[* 이보다 앞선 4월 25일에는 그동안 매주 목요일마다 '아름다운 목요일'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던 기획 연주회가 광화문에서는 마지막으로 열렸다. 금호아트홀 광화문 연주회장의 실질적인 고별무대였던 이날 공연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를 비롯해 여러 음악팬들이 참석하여 아쉬움을 달랬다.] 당연하게도 많은 클래식 음악인들이 안타까움과 아쉬운 감정을 내비치고 있다.[* 특히 같은 시기에 금호그룹이 아시아나항공을 매각하는 등 경영난을 겪는 상황이어서 더욱 비극적인 모습으로 비춰졌다.] 이후에는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구내 지하공간인 백양누리에 있는 공연장,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연세대는 동생 [[박정구]]와 [[박삼구]]의 모교인데 [[박삼구]]가 2008년부터 12년간 총동문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금호아트홀 연세는 동문회장 재직 시절에 세워졌다.] 공연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박 회장이 2005년 세상을 떠나자 클래식 음악의 발전을 지원하며 문화예술 진흥에 힘쓴 고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 [[문화훈장|금관문화훈장]]을 사후 추서했다. 박 회장은 단지 음악가들에 대한 금전적 후원만 한 것이 아니라, [[클래식 애호가|상당히 클래식에 조예가 깊었던 매니아]]로 알려져 있다. 박 회장이 점찍은 첫 번째 유망주 [[손열음]]이 책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박 회장이 저택에 있는 그랜드피아노를 조율하는데 본인의 지론과 조율사의 지론이 충돌하는 바람에 이를 해결하고자 손열음에게 의견을 자문할 정도였다고 한다. 박 회장은 A음이 약간 낮은 440Hz인게 좋아서 그렇게 조율해달라고 했지만 조율사는 보통 442Hz 정도로 살짝 높게 조율하는게 추세여서 현재의 추세대로 하겠다며 박 회장의 희망사항을 거절하게 된다. 이후 박 회장과 조율사가 대판 싸웠는데 대뜸 박 회장이 손열음에게 전화를 걸어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 일은 손열음이 한국예술종합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때였는데 이 당시 손열음은 불과 17세의 소녀 연주자였다. [[파일:external/dimg.donga.com/70535757.2.jpg]] 2015년 4월의 10주기 추모행사에는 피아니스트 손열음,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 등 금호그룹이 발굴, 육성한 클래식 음악인들이 다수 참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