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세직 (문단 편집) == 생애 == 1933년 9월 18일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구평리에서 태어나 경북 선산군 선산읍 죽장리에서 성장해 [[부산교육대학교|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사 12기로 임관하였다.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채명신]] 초대 파월사령관이 미군들과 파병 관련 한국 지원 및 작전 구역 설정, 그리고 지휘체계 설정 협상하는 과정을 지원하며 활약하였다. 이후 1976년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냈고, 1979년 군사정보 참모를 지냈다. [[12.12 군사반란]] 시점에 철원 소재 3사단장으로 나가 있었고, 직후의 논공행상에서도 보직이동을 하지 않는 바람에[* 이와 반대로 전두환의 하나회 동기인 [[정호용]]은 대구에서 50사단장으로 복무중이라 반란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12.12 직후 특전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5.18 민주화운동|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강경 진압에 앞장섰다.] 박희도나 박준병과는 달리 [[12.12 군사반란|12.12]]와 [[5.17 내란|5.17]]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이 덕에 민주화 이후 [[문민정부]]에서 하나회 인사들 상당수가 12.12와 5.18에 연루되어 사법처리될 때 박세직은 사법처리되지는 않았다. 1980년 8월 [[전두환]]이 국군보안사령관에서 예편하여 대통령이 되고 제8대 수도경비사령관이던 [[노태우]]가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자 노태우의 뒤를 이어 제9대 수도경비사령관(현 [[수도방위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신군부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듯 했으나, 1981년 8월 [[소장(계급)|소장]] 계급으로 예편하였다. 겉으로는 박세직이 육군사관학교 동기의 사업을 도와 준다면서 비리를 저질렀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두환과 [[허화평]], [[허삼수]] 등 측근 세력이 '하나회 출신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권력을 넘보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본보기를 보여 주려고 박세직을 내쳤다는 썰이 있다. 당시 박세직은 박준병 국군보안사령관에 의해 조사를 받고 예편하였는데, 박준병은 박세직이 여기저기 “차기 대통령은 나”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1973년 일어난 [[윤필용 사건]]에서처럼 수도경비사령관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이 보안사령관인 상태에서 보안사령관이 동기생을 수사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1982년 [[한국전력공사]] 부사장을 지냈다. 1983년 [[국가안전기획부]] 제2차장에 임명되어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과 함께 그 해 5월에 일어난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을 해결하였다. 1985년 2월 노신영이 [[국무총리]]에 임명되면서 총무처(현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함께 입각하였다. 1986년 제4대 체육부 장관으로 취임하고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장 겸 [[1988 서울 올림픽|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 [[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107_428_1.jpg|width=100%]] || ||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조직위원장으로서 환영사를 낭독하는 박세직. 왼쪽은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당시 IOC 위원장 || 1988년 12월 배명인의 뒤를 이어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임명되어 1989년 7월까지 재임하였다. 1990년 12월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91년 2월에 사직하여, 2개월의 단명시장에 그쳤다. 1991년 일어난 [[한보그룹]]의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수서비리 사건]]과 관련하여 여러 모로 루머가 많았는데, 원리원칙으로 저항한 전임 [[고건]] 시장이 잘리고 그 자리에 바로 들어와서는 일사천리로 무주택자 배급용 택지를 특별분양하는 데 사인했기 때문. 그러나 수사 대상에 오르지는 않았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경상북도]] 구미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국당]] 후보로 [[구미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자유민주연합 [[박재홍(1941)|박재홍]] 후보를 꺾고 재선되었다. [[김대중]] 정권이 출범한 후 1998년 4월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부총재가 되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월드컵]]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06년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재향군인회]] 회장으로 취임하여 재임하던 중 2009년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신임 회장이 선출되기 전 까지는 [[김홍열(군인)|김홍열]] 전 해군참모총장이 직무대리를 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