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승종 (문단 편집) == 생애 == 유일한 [[밀양 박씨]] 출신 정승. 박승종의 증조부는 명종 당시 홍문관, 도승지, 대사헌, 관찰사, 판서 등을 역임한 박충원으로 영월에서 관리들이 족족 죽어나가는 일이 있자, 박충원을 미워한 [[윤원형]]의 심복 임백령이 그를 영월 군수로 좌천 보내었는데, [[단종(조선)|단종]]의 묘소를 가꾸고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고 제문을 지어 위로하여 곱게 살아서 돌아왔다. 박승종의 조부이면서 이와 똑같은 관직을 지낸 박계현은 진사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시험을 보았는데 三上(중상보다 딱 한 단계 더 높은 점수)을 받자 임금과 대신들이 박충원의 아들이라 평소 글 솜씨가 뛰어난 자이고 위 답안도 아주 우수한데 그날 시험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채점이 개판이었다고 깐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아버지와 함께 공문서 작성에는 유능하기로 명성이 있던 자였다. 벼슬없이 한량으로 지낸[* 나중에 받은 지돈녕부사는 증손녀가 세자빈이 되면서 명예직으로 받았다.] 박안세의 아들이다. 북인의 핵심 인물이나, [[이이첨]]을 제외한 [[류희분]], [[기자헌]], [[유몽인]], [[박홍구]]와 같은 광해군 시절 북인의 권신들이 모두 그렇듯, 대중적 인지도는 전혀 없다.[* 대중매체에서 비중 있게 나온 사례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광해군편이 있다.]사실 광해군의 며느리의 할아버지이고 광해군 말기 5년간 마지막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라 광해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인물이다.[* 다만 유희분, 기자헌은 사극에 많이 나왔고 박승종도 사극에 많이 나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