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승종 (문단 편집) === [[인조반정]]과 사망 === 박승종도 인조 반정을 손놓고 있지 않았던 것이 당시 한양에 가장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있던 훈련 대장은 심복이었던 이흥립을 뽑아 놓았고, 경기 감사도 본인의 맏아들이었던 박자흥은 경기 감사가 되기 직전 벼슬이 대사성(성균관에서 제일 높은 벼슬)이었는데 병졸의 선발 및 배치 업무를 담당한다. 비변사에서 병조 판서도 아닌 사람이 왜 병졸의 선발 및 배치 업무를 하냐고 대차게 깐 기록이 있다. 이이반과 김신국이[* 이이반은 반정 직후 참살되고, 김신국은 폐모론에 소극적으로 참여했음에도 능력을 인정받아 목숨을 부지하고 재등용된다.] 인조 반정 전날 저녁 이후배, 이후원이라는 자로부터 인조 반정 사실을 듣게 되고 바로 고변하자, 박승종은 즉시 추국청을 설치하여 이후배를 궁궐 마당에 포박하고,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고 한다. 그런데 하필 광해군이 이때 [[김자점]]에 매수된 후궁과 잔치를 벌이던 참이라 이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박승종은 이흥립을 불러 '너 혹시 김류, 이귀하고 함께 모반하려고 하냐?'라고 물어보았는데, 이흥립이 '제가 딴 사람도 아니고 공을 배반하겠나이까.'라고 하자 그 말을 믿고 만다. 이흥립은 나중에 인조 반정 공신 목록에서 1등 공신을 받는다. 심지어 이흥립의 사위 장신이라는 자는 이흥립을 추천하였다는 공으로 3등 공신을 받게 된다.[* 장신은 반정의 일원인 형 [[장유(조선)|장유]]의 덕을 입은 것도 크다. 후에 병자호란 때 김경징과 함께 강화도 방어를 책임졌으나 실패하고 그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결국 다음 날 새벽 2시 드디어 인조 반정이 벌어지는데, 경황 중에 겨우 몸을 내뺀 광해군의 첫 마디는 '[[이이첨]]이 그랬느냐?'였다는데, 박승종이 전날 이야기를 들으면서 [[박홍구]]와 같이 김류, 이귀 싹 잡아들이자고 주장했지만 광해군은 오로지 이이첨 생각이었다. 박승종 역시 손만 놓고 있던 건 아니어서 맏아들인 경기 감사인 박자흥에게 낌새가 이상하니 준비하라고 했다. 인조 반정이 벌어지자 박자흥은 재빨리 경기 감사의 직위로 수원 부사 조유도에게 군대를 이끌고 즉시 한양으로 달려오라고 명령하였고, 당시 5촌 당숙이었던 양주 목사 박안례에게도 병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거병하여 달라고 부탁하여 인조 반정 당일 이미 병사들이 한양으로 부리나케 뛰고 있었다고 한다. 파주 목사 윤정에게도 병사들을 모집해 한양으로 달려오라고 했는데 여기는 소식이 늦게 도착해서 병사들을 출병하지 못했다. 당시 인조 반정 측에서는 수원 부사인 조유도는 인조 반정에 참가한 조정의 아들이라 조정이 직접 설득하기로 하고,[* 얄궂게도 조유도는 유희분의 사위이자, 폐모론에 동조한 사람이였다. 성정이 거칠어 당시에도 평이 안좋았고, 모반 사건에 연루돼 귀양을 가 생을 마쳤다.] 양주 목사 박안례가 이끄는 군대는 이서가 군대를 이끌고 막기로 한다. 그런데, 궁궐이 완전 점령되고 이미 임금이 바뀌었다는 말을 듣자 박승종은 양주 목사인 박안례에게 이미 임금이 바뀌었으니 더 이상 피를 보지 말라는 편지를 한 통 써서 보내고, 둘째 아들인 영광 군수 박자응에게는 너는 자결하지 말고 살아 남아 제사를 지내라는 편지를 한 통 써서 보내고, 맏아들인 경기 감사 박자흥에게는 다 끝났으니 즉시 병사를 해산하고 돌아오라는 인편을 보낸 후 박자흥과 함께 자결한다.[* 박승종은 여차하면 자결하려고 비상을 항시 소지했는데 급히 도망친터라 비상을 잃어버린 후였다. 결국 노끈으로 충직한 하인을 시켜 목을 메 자살했다. 반대로 연산조 때 [[윤필상]]은 제 때 비상을 먹었으나 효과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목을 메 고통스레 죽었다.] 한편 조정에서는 김류가 박승종과 유희분의 죄가 크긴 하지만 이이첨과는 다르니 살려주자고 청하였다.[* 과격하기로 소문난 [[이귀]]조차도 저들은 폐모에도 반대했으니 좀 봐달라고 간청했을 정도다.] 인조는 "신하가 되어 불충한 것은 그 죄가 모두 균등한 것이다."라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나 이덕형(李德泂)도 광해군이 왕으로 있은지가 16년인데 어찌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 있겠냐고 반대하여 인조가 "개진한 일에 대해서는 내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유희분이 죽은걸 보면 목숨을 부지하긴 어려웠을듯. 이후 그의 죽음이 확인된 후에도 이귀와 김류가 모두 박승종을 옹호하였는데, 이귀는 "유희분과 박승종이 비록 탐하고 교만하고 사치한 죄는 있으나 사류(士類)를 보호한 공로가 없지 않습니다. 어찌 이첨과 죄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고, 김류는 "무오년 간에 신이 여러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거의 불측한 지경에 빠졌었는데 승종이 극력 구제함으로 해서 죽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승종이 만약 폐군의 뜻을 따랐다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 이첨이 폐모론으로 폐주를 현혹시키고 옥사를 꾸밀 때 승종은 극력 그 논의를 배격하면서 사류를 구호했으니 어찌 그 탐장(貪贓)의 죄만을 가지고 이첨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인조는 여전히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이후 이서가 박승종의 시신을 거두어달라고 인조에게 청하자 인조가 "상소를 살펴보고 경의 신의에 감격하여 찬탄을 금할 수 없다. 경이 충의를 분발하여 윤리와 기강을 세웠고 옛 은혜를 잊지 못하여 버려진 시신을 거두고자 하니, 경은 실로 금세의 선비가 아니다."라고 칭찬하면서 시신을 검시한 후 매장하라고 하였다. 결국 인조 1년 4월 30일, 관작을 추탈하고 유희분의 전례에 따라 재산을 속공하면서 유희분처럼 죽였어야 했는데 죽이지 못해서 아깝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후 여러 차례 복권 논의가 있었고, 마침내 [[1857년]](철종 8) 6월 13일에 우의정 조두순이 박승종이 비록 광해군의 척신(戚臣)이며 당시의 혼정을 방관한 혐의는 있지만, 군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신하로서의 도리를 지킨 점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고 말하였다. 더욱이 유몽인도 광해군을 위해 절의를 지킨 점이 인정되어 뒤늦게나마 신원된 일이 있음을 언급하며, 박승종 부자에게도 그와 같은 조처가 내려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결국 이러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마침내 박승종 부자는 사후 230여 년만에 생전에 그들이 지녔던 관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고종 8년, 숙민(肅愍)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08_05A_03A_0015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