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승종 (문단 편집) === 이후 === [[김류]]와 [[이귀]]는 막상 [[인조반정]] 당일 광창부원군 [[이이첨]], 밀창부원군 박승종, 문창부원군 유희분 등 소위 '3창'이라고 불리는 자들 중에서 박승종이 "[[인목왕후]] 폐출을 반대했고 같은 반정 공신인 [[이서(1581)|이서]]가 박승종의 친족이니 박승종을 살려주자"고 합의가 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반정 세력의 립서비스일 수도 있는데 일찍이 [[중종반정]] 당시 [[중종(조선)|중종]]의 장인 [[신수근]]도 반정 세력에 권유를 받았으나 반대했다고 살해당했다. 박승종은 손녀가 [[폐세자 이지]]의 빈이었고 이 부부는 귀양지에서 땅굴을 파다가 들통이 나 폐세자는 처형당하고 세자빈은 [[자결]]했는데 살아있어도 이 일에 연루되어 피해를 받을 공산이 컸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이 박승종을 살려주자고 합의가 되어있기는 했지만 박승종은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박승종과 함께 폐모론을 반대한 유희분을 이귀, 김류 등 반정 공신들이 살려주자고 [[인조]]에게 청했지만 인조는 반정 공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박승종을 처형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귀와 김류에게 인조는 "박승종이 이이첨과 뭐가 다르냐"며 박승종을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이귀와 김류가 "이서에게 박승종을 죽이지 않겠다며 약속을 했다"고 말하자 인조는 "처음에 약속을 했을지 몰라도 법을 굽힐 수는 없다"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실제로 박승종에게 호응하여 [[군대]]를 일으킨 박안례도 그 날 그냥 풀어주었고 박승종의 동생들은 형하고 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박승종의 둘째 아들인 박자응은 유배다녀온 후 박승종의 동생인 박승조와 함께 살았다.] 유희분과 아우 유희발을 처형해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박승종이 죽은 후에는 공신들도 유희분의 처형에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공신들은 어디까지나 박승종을 변호하면서 유희분도 덤으로 끼워넣어서 변호했고, 박승종이 죽자 변호할 이유가 사라져서 유희분을 살리는 것도 관심을 끊었을 수도 있다.] 인조는 박승종을 부정적으로 생각한걸 보면 박승종 역시 유희분처럼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박승종의 직전 [[영의정]]이었던 [[기자헌]]은 대북이기는 한데 [[기대승]]과 친척이다. 정확히는 형인 기진의 아들이 기대승이고 동생인 기준의 증손자가 기자헌이다. 기대승은 [[이황]]과 사단칠정론을 벌인 대학자로 이는 나중에 [[서인]]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한다. 할아버지인 기대항은 1563년 서인의 창시자인 [[심의겸]]의 지시를 받고 [[사헌부]]의 죄상을 모조리 [[탄핵]]한 사헌부를 쑥대밭으로 만든 적이 있던 사람이다. 의외로 [[붕당]] 초기에는 서로 [[족보]]가 꼬이는 경우가 많은데 일례로 [[윤두수]]는 이황의 대제자이다. 기자헌은 서인과 [[남인]] 정치인들이 광해군의 옥사에 반대하였을 때 대북의 영수면서 대척점에 서서 찬성했지만 이후에 소북 정치인과 비슷하게 이이첨과 [[허균]]이 주도한 인목왕후의 폐출을 반대하였던 인물이 되고 [[정치]]에서는 은퇴한지 6년이 다 되가는 터라 인조반정 당시에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서인 [[정권]]은 이이첨과 류희분을 죽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급기야 [[이괄의 난]]이 발생한 직후에 기자헌은 서인과 남인들의 엄청난 견제로 인해 결국에는 [[사약]]을 마시고 사실상 자결했다.[* 기자헌과 비슷한 시기에 [[북인]] 정치범 37명이 잡히고 있었는데 기자헌과 달리 논쟁이 있어서 이귀는 37명에 대해 국문을 통해 [[사형]]과 [[유배]]를 가릴 것임을 의견을 냈으나 김류는 전부 처형할 것임을 의견을 냈다. 조정에서는 김류의 의견이 받아들여 북인 정치범 37명은 무자비하게 처형된다.] 기자헌과 북인 정치범 37인은 [[이원익]]과 이귀가 5년 후에 모조리 복권시켜 주기는 하지만 중간에 [[정묘호란]]이 겹쳐서 인력 부족이라는 이유로 복권한 이후에도 그들의 신분은 [[양반]]이 아니라 농민, 어민, 상인들과 같이 상민 [[신분]]으로 지내게 되면서 농사나 짓고 시장에서 장사하는 등 생업을 이어가며 조정에서의 관심을 완전히 끊게 된다. 한편 북인 [[권신]]과 광해군의 측근들에 대한 잔혹한 [[숙청]]으로 북인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임취정과 박홍구가 광해군을 복위 시키거나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모시고 [[인성군]]같은 종친을 [[왕]]으로 옹립하는 거사를 준비하지만 발각이 되어서 처형당했다. 남이공과 김신국을 중심으로 한 소북은 정계에서 계속 이어가다가 이후에 남인에 흡수되면서 조정상에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