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연 (문단 편집) == 생애 == 1378년 8월 20일 [[경상도]] 상주목 영동현 고당리(현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지금도 고당리에는 난계의 사당인 난계사(蘭溪祠)가 남아 있으며 근처에는 난계 국악기 체험장이 있다. 이 외에도 영동군에서는 난계 박연이나 국악과 관련된 시설 및 행사가 많다.]에서 고려 때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낸 아버지 박천석(朴天錫)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오(金珸)의 딸 사이에 아들로 태어났다. 1405년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8&aid=0002460379|#]] 1411년 식년시 문과에 동진사 1위로 급제하였고 진사, 집현전의 교리, 사간원의 정언, 사헌부의 지평, 세자시강원의 문학을 역임하였다.[* [[개명]]하기 전 이름인 박연(朴然)을 사용했다.][[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411_000252|#]] 1423년 의영고 부사였다가 제생원의 의녀 중에 총명한 자를 골라 글을 가르치는 일을 맡은 적이 있으며 1425년 [[음악]]에 대한 책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해주시|해주]]에서 발견한 [[기장(식물)|기장]] 알갱이를 기준으로 1알을 1푼, 10알을 1촌으로 하여 9촌의 황종율관[* 이 황종율관은 [[삼분손익법]]에 의해 12율을 산출하려면 꼭 필요한 1번째 율관이다.]을 만들었다. 1426년 봉상판관 겸 악학별좌를 지냈는데 봉상시판관을 지내면서 [[명나라]]에서 보낸 [[악기]]인 소관을 사용하기를 왕께 요청하거나 음악에 대한 [[상소]]를 왕께 올렸다. 1425년의 황종율관이 [[중국]] 아악기와 음률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박연은 중국 편종과 편경을 기준으로 1427년에 2차 황종율관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박연은 만족하지 못하였고 다음과 같이 상소한다. "지난번에 해주의 기장으로 황종율관을 제작했을 때 그 황종음이 중국 편경보다 높았는데 그 원인은 땅이 메마르고 날이 가물어서 기장 알갱이가 작았던 까닭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번에는 그보다 알갱이가 굵은 남쪽 지방의 기장 알갱이를 대중소(大中小) 3가지로 나누어 3가지 기장 알갱이를 사용한 세 황종율관을 만들어 그 중에서 중국의 편경과 맞는 율관을 골라서 그것을 [[삼분손익법|삼분손익]](三分損益)하여 12율관을 만들려고 합니다. 율관을 만드는 일이 지금 제일 급선무이오니 영단을 내리시어 곧 시행하도록 해주실 것을 바랍니다. 중론이 벌떼같이 일어나면 뜻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3차 율관 제작이 결국 실행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1427년 아악기 중 하나인 석경을 제작하여 왕께 올리기도 했으며 사직단의 신위를 고쳐 만드는 것에 대해 백관들이 논의할 때 악기에 대해서는 박연에게 맡겨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1430년 봉상시소윤을 지내면서 아악을 쓰고 향악을 쓰지 말자고 건의하였으며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자 이를 위해 힘을 쓰다가 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1432년 관습도감의 별감을 지낸다. 1433년 그가 건의한 아악이 처음으로 궁중에서 사용되었고 이후에도 음악에 관련된 여러 상소를 올렸다. 1439년 악학제조, 1453년 예문관의 대제학, 1455년 중추원의 제조를 역임하였다. 음악적인 [[재능]]은 뛰어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남겨진 [[인성]]과 관련된 기록들은 그가 인성이 바르지 못한 인물이였음을 알게 한다. 그는 궁의 악공들을 데리고 사사롭게 영업 행위를 하는가 하면 누이가 죽은 뒤에 바쁘다는 핑계로 유산만 챙겨서 얼른 돌아오는 등의 행동을 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 일로 1448년 잠시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복직된 이후로는 [[단종(조선)|단종]] 대까지 음악 일을 맡다가 아들인 박계우가 단종 복위 운동에 연관되어 [[세조(조선)|세조]]에게 [[숙청]]당할 당시 박연 또한 이에 연루되어 처형될 뻔했으나 왕이 3번 바뀌는 동안 [[벼슬]]을 하며 [[왕실]]을 보좌했다는 점이 참작되어 처형은 면했고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뒤 1458년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세종의 눈에 들어 세종조에 조선의 음악을 정비하는데 힘썼지만 세종과는 견해가 많이 달랐다고 한다. 본류가 유학자라서 그런지 박연은 아악 중심으로 궁중 음악을 재편하고자 했지만 세종은 중국인들은 생전에도 아악을 들었으니 제사에도 연주해도 무방하나 우리 조상들은 생전에 향악만 들었다고 하여 따르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