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완서 (문단 편집) == 생애 == 1931년,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https://www.joongang.co.kr/article/4965051|#]]에서 [[반남 박씨]] 집안의 1남 1녀 중 [[외동딸|둘째]]로 출생했다. - 오창공파 부: 泳魯 조부: 胄陽 박완서가 3살 때인 1934년에 아버지가 [[맹장염]]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에 빈 자리를 크게 느끼지 않고 자랐다. 특히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박완서는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일본식 음독으로 보쿠엔쇼라고 불린 적은 있을지언정 이름을 고치는 일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의외로 당시 교사들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닦달을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딸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었던 어머니의 강력한 요구로, 1938년 [[개성시|개성]]에서 [[서울특별시|경성]]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교육열이 강한 어머니 덕분에 동네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소학교부터 경성의 명문학교에 다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딸에게는 교육의 기회를 거의 주지 않던 시대인데도 어머니가 박완서의 교육에 열성을 보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어머니의 외사촌자매들은 서울에서 신교육을 받았는데, 어머니는 어린 시절 자기와는 다르게 학교에 다니는 그 친척들을 무척 부러워했기 때문에 자기 딸만큼은 신교육을 받기를 원했다. 그리고 박완서의 아버지의 사망과 관련된 사연이 그 두 번째 이유인데, 사실 아버지의 사인인 맹장염은 그 시절 의학 수준으로도 수술만 받으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병이었다. 그런데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박완서의 할아버지가 병원에 가지 못하게 하고 침과 한약만으로 치료하기를 고집하다가 끝내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사망한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남편의 죽음은 전부 [[시가]](媤家)의 고루한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치를 떨었고, 자식들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해방 1년전인 1944년 [[숙명고등여학교]]에 입학했으나, 바로 다음 해에 일제의 소개령으로 인해 개성으로 이사하여 [[호수돈여자고등학교|호수돈고등여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고향으로 가 보니 어렸을 때 놀던 친구들이 [[위안부]]로 잡혀갈까봐 모두 서둘러 결혼한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고 한다. 경성에서 살 때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경성 학교와 지방 도시 학교 간의 환경적인 괴리가 꽤나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개성에서 살던 중 [[광복|해방]]을 맞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숙명여자고등학교|숙명여자중학교]][*6년제]를 다니게 된다. 당시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한 명이 바로 소설가 [[한말숙]]으로, 졸업 이후에도 절친한 사이를 유지했다고 한다. 또한 박완서의 반 담임 교사가 소설가 박노갑 이었기에 문학적으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박노갑은 그 시기의 어린 학생들이 쓰기 쉬운 감성적인 문장을 지양하고 사실적이고 경험이 실린 글을 쓸 것을 강조했는데, 훗날 박완서는 정작 그런 말을 들었던 고등학생 때는 스승인 박노갑의 소설을 읽으면서 참 재미가 없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 뒤 1950년 6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한 달도 못 되어서 [[6.25 전쟁]]이 발발한다.[* 1950년은 6월에 입학을 하도록 한 유일한 해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4월 신학기제였는데, 해방 후 미군정 시기 미국식으로 9월 신학기제가 실시되었다. 이후 9월 신학기제가 실정과 맞지 않아 다시 4월 신학기제로 돌아가기로 결정되었는데, 학년도를 5개월을 단축해야 하는 무리한 점이 있어 과도기적 조치로 1950년에는 6월에 입학하도록 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에는 서울이 [[조선인민군]]의 점령 아래에 있게 되었지만 박완서네 가족은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었을 뿐만 아니라 8월까지는 학교도 계속 다녔다. 당시 박완서는 [[공산주의]]에 호의적이었지만, 상황을 지켜보면서 점차 회의를 느끼고 학교에도 출석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전쟁으로 오빠와 숙부를 잃고 말았으며, 이 때문에 가장으로서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에 들어선 미8군 [[PX]]의 초상화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다. 이후 같은 건물을 사용한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동화백화점]]에서 일하다 같은 동화백화점 측량기사였던 [[서울토박이]] 집안 출신인 호영진과 1953년 결혼했으며, 1남 4녀의 자식을 두었다. 결혼한 뒤로도 독서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평온한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글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68년 열린 박수근의 유작전을 보고 그에 대한 증언의 욕구가 치솟으면서 글을 쓸 결심을 하게 된다. > 처음에 제가 시작한 거는 소설이 아니라 전기였어요. 박수근 전기를 써야겠다. 투고하게 된 것도 처음부터 <여성동아>였던 게 아니에요. 여성동아에서는 7월달에 여류장편소설 마감이 있고, 또 <[[신동아]]>가 있지요. 지금은 교양지도 많지만 그때 신동아가 아주 고급 교양지였습니다. 거기서는 논픽션 공모를 했어요. 그것이 5월이 마감인데, 이듬해 1969년이었을 거예요. 논픽션은 기럭지가 길지 않아요. 여류 장편은 1,200매 이상이어야 되는데 이거는 300, 400매만 해도 되고. 그래서 저기다 내야지 하고 쓰기 시작했어요. 써 보려고 하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는 거예요. 그냥 PX에서 그런 일 있었고, 같이 차를 마시면서 어딜 사냐, 창신동 살고.. 이런 얘기 외에는. 쓸 거라곤 나 같은 거한테 그렇게 막 취급받고 화가로서는 우중충한 데 앉아서 그리면서 얼마나 모욕스러웠을까, 고거 원고지 10장도 안 되는 거예요. 논픽션이면 그 사람이 어쩌고저쩌고 다 있어야잖아요. 그런데 아는 것도 거의 없어요. > > 그러니까 자꾸 쓰다가 빗나가면서 내가 상상한 걸 보탤 적이 있어요. 그럴 때는 즐겁게 써져요. 원고지에다가 쓸 때니까 하루 대여섯 장만 써야지 했는데, 20장도 써지는 날이 있어. 보면 막 내가 보태는 거야. 고 다음날 계속해서 쓰려고 어제 거 읽어 보면, 이건 아닌 거예요. 진짜만 추리고 나면 뼈대만 남고. 말보다는 거짓말을 보태니까 잘 써진다 싶어요. 거짓말을 시키는 게 내 소질이라는 걸 느꼈어요. 그때는 생각도 못했지만, 쪼끔 어려운 말로 하면 상상력이죠. 사실에다 상상력을 보태야지 사실의 뼈대만 갖고 쓰는 건 난 도저히 재미가 없구나. > > 그런데 만약 논픽션에 냈는데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지면 당선이 됐다가도 취소가 되는 거 아니에요? 거기 규정이 있어요. 논픽션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잖아. 그러면 허가받은 거짓말이라는 건 뭐냐. 픽션이 나에게 맞는구나. 아, 거짓말을 보태니까 이렇게 즐겁고. 쓰는 게 즐거워야 되잖아요? 그래 갖고 쓰던 걸 아주 파기를 해 버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날짜도 좋더라고. 내가 그 해, 1970년 초였을 것 같애요. 5월달에 낼려고 쓰던 거를 2,3월 됐을 때 다 찢어버리고는 느닷없이 소설로 바꿨어요. 그거는 1,200장이나 되고 마감은 7월이었습니다. 그렇게 안 나가던 붓이 방향 전환을 하고 나니까 너무너무 빨리 써지는 거예요. 그렇게 써낸 글이 바로 박완서의 데뷔작,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인 <[[나목]]>이었다. 실로 대단한 점은 처음 쓰는 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습작도 퇴고도 없이 단 한 번에 장편소설 분량을 주욱 써 낸 글로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박완서는 당시 글을 쓰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첫째는 상금 50만 원을 타서 남편한테 나도 돈 벌어왔다고 자랑하고 싶다는 것과, 둘째는 딸을 잘난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한 어머니를 기쁘게 해 주고 싶다는 것. 고생만 하고 막상 공모에서 떨어지면 창피하니까 자식들 몰래 학교 간 뒤나 밤에 주로 글을 썼는데, 졸릴 때 자신을 격려해 준 것이 바로 그 50만 원과 어머니 생각이었다고 한다. > 질문자: 처음 써 보는데 1,200매를 다 쓸 수가 있었어요, 선생님? > 박완서: 그러믄요. 네. > 질문자: 습작을 안 하셨잖아요? > 박완서: 습작 안 해도 책 많이 읽으면 돼요.[* 이상 두 부분은 2012년 출간된 '박완서: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 1931~2011'을 인용했다.] 박완서는 그 때까지만 해도 부끄러운 기억이었던 PX 생활이 오히려 작가로서 이름을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등 자신에게 좋은 것들을 많이 가져다준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다양한 작품을 왕성하게 발표했다. 전쟁 당시의 상황을 다룬 [[나목]]과 목마른 계절, 중산 삶을 다룬 도시의 흉년과 휘청거리는 오후 등의 작품을 비롯해 억압받는 여성 문제를 다룬 살아 있는 날의 시작, 서 있는 여자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씌어진 욕망의 응달, 독립투사와 친일파의 자손 문제를 다룬 오만과 몽상, 자신의 인생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이자 대표작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을 발표했다. 말년의 작품들은 그 동안 갈고닦아 온 날카로운 안목과 글솜씨의 정수가 그득한, 이른바 노년문학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 '그 가을의 사흘 동안'으로 한국문학작가상을, 81년 '엄마의 말뚝 2'로 [[이상문학상]]을, 90년과 91년 '[[미망(소설)|미망]]'으로 대한민국문학상과 이산문학상을, 93년 중앙문화대상을, 같은 해에 '꿈꾸는 인큐베이터'[* [[남아 선호 사상]]과 [[80-90년대의 여아낙태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로 [[현대문학상]]을, 94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 [[동인문학상]]을, 95년 '환각의 나비'로 [[한무숙문학상]]을, 97년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대산문학상을, 99년 '너무도 쓸쓸한 당신'으로 만해문학상을, 2000년 인촌상을, 01년 '그리움을 위하여'로 [[황순원문학상]]을, 06년 호암상을 수상했다. 2006년에는 전쟁 때문에 졸업하지 못했던 모교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수여를 제의하여 받아들였다. 서울대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한국인으로서는 7번째. [[http://blog.naver.com/codbswldi/20024178237|박완서의 인사말]]. 자녀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아들 위로 딸이 4명 더 있는데, 그 사람들 중 맏딸은 수필가 호원숙, 셋째 딸은 서울대 의대 호원경 교수다. [[2008년 촛불시위]] 당시에 시위대와 정부 양쪽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 양쪽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케이스.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 당시 정부를 믿는다고 발언하였고, [[4대강 정비 사업]]에 대하여는 정부가 잘 설명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2011년 1월 22일, [[경기도]] [[구리시]] 자택에서 [[담낭암]] 투병 중 향년 80세로 사망하였다. 평소 자신이 죽은 후 찾아오는 가난한 문인을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 당부했다고 한다. 묘는 남편과 아들이 묻힌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다. [[파일:external/www.google.co.kr/park_wan_suh11-hp.jpg]] 2011년 10월 20일, 탄생 80주년을 맞아 [[구글 두들]]이 만들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