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완서 (문단 편집) == 일화 == * 박완서는 [[북한|인공]] 치하 [[서울대학교]]에서 [[국문학과]] 강의를 계속해서 들었고, 북한을 찬양하는 강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를 완전히 바꾸는 사건이 있었으니, 아버지 없이 커온 어릴 적. 머리도 좋고 공부도 많이 해 '영웅'이었다고 회고할 만큼 그녀의 우상이었고 각별했던 친오빠[* 전쟁 이전 좌파적 사상에 잠시 발을 담근 적이 있다고 한다.]가 북한의 [[민병대|의용군]]에 끌려가는 변고를 당했다. 부상을 입고 탈주한 뒤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가족들이 남아있던 서울로 돌아왔으나 부상 후유증으로 결국 사망한다. 결국 오빠의 조카들과 늙은 어머니를 먹여살리기 위해 남겨진 올케와 박완서가 가장이 된다. 박완서가 겪었던 공산주의 지배 하에서의 고난은 이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공산주의의 인간성(개성)의 말살에 대해 비판하는 등 공산주의 이념에 반대하는 계기가 된다. > '이십 대에 코뮤니스트가 아니면 하트가 없다'는 말따라 오빠는 코뮤니스트였는데 막상 전쟁의 참상을 겪더니 모든 인텔리들이 그렇듯이 코뮤니즘에 회의를 느껴 사상적 방황을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의용군으로 끌려나가더니 928 때 도망쳐서 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더군요. 그런데 피해망상증과 공포로 정신이 완전히 망가진 것 같았어요(육체도 허물어졌지만). 그러다가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오발 사고로 총상을 입고 세상을 떠났지요. 나는 아버지가 일찍부터 안 계셨기 때문에 단 한 혈육인 오빠에게 많이 의지하고 살았는데, 아, 참으로 끔찍했어요. 오빠의 생각들로 지금도 가위눌리고, 하도 악몽을 꾸니까, '써버리면 악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지' 하고 좀 써버리려고 해도 너무 가까운 사람이어서인지 잘 써지지가 않아요. * [[나목]]으로 등단하였을 당시의 나이는 39세. 그 전까지는 전업주부로 살며 자식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몰래 집필했다고 한다. 집에서 일기를 쓰는 모습도 본 적이 없던 자식들은 어머니의 등단 소식에 매우 놀랐지만 이내 응원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 원고를 받았던 기자도 40세의 전업주부가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것을 믿지 못해 직접 찾아와 본인이 썼는지 증명하라고 해 집필 당시 적어둔 메모 등을 보여주어 증명했다고 한다. * 초기 박완서의 작품은 극단적으로 [[6.25 전쟁|6.25]]가 배경인 것이 많다. 그 외에 남자가 잘 없는 모계 중심의 가정인 경우도 꽤나 흔하다. [[한국전쟁]] 당시 박완서가 겪었던 경험, 즉 오빠의 죽음과 남겨진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의 대표작 [[엄마의 말뚝]]에서 형상화되었다. 작품 속에 그녀의 진짜 이야기라고 할 만큼 특유의 경험이 그대로 실려있으며, 특히 오빠의 죽음과 배경 설명이 거의 그대로다. 단, 소설 속에서 서술자의 오빠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죽는다'''. * 출판사 쪽에서는 근래 보기 드문 성실한 작가로 소문났었다. 그리고 특별한 이윤을 취하지 않는 작가로도 알려졌다. 물론 과도한 인세를 요청한 모 작가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 이야기이겠지만, 네임밸류에 비하면 과도한 인세 요청은 잘 하지 않고 오히려 집필에 신경 쓴 편이라서, 출판계에서 박완서의 평은 좋다.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도서관에 박완서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다. [[https://www.gurilib.go.kr/inlib/introduction/facilities6.jsp|참조]]. [[구리역]]에서 멀지 않으므로 평소 박완서에 대해 관심 많은 분들은 찾아가기 좋기는 하나, 정말 볼 게 없다. 하다 못해 흔한 시청각 자료도 운영치 않고 있다. 그냥 친필 원고 몇 개랑 책 전시 몇 개가 전부. 기념관을 더 알차게 꾸며서 운영했으면 하는 바람. * 그 나이 작가로는 드물게 일찍부터 [[워드프로세서]]로 작업했던 작가이기도 하다. * 가수 [[이적(가수)|이적]]과도 인연이 있다. 중학교 3학년이던 이적이 용돈을 [[군것질]]에 몽땅 탕진하고, 어머니께 이를 무마하고자 시 한 편을 집필했는데, 그의 어머니가 이를 보고 감동하여 이 시를 다시 박완서에게 보내었고, 그녀도 중학생이 어떻게 이런 시를 썼냐며 감탄했다고 한다. 다음은 그 시의 내용의 일부다. > 습한 얼굴로 > AM 6:00이면 > 시계같이 일어나 쌀을 씻고 > 밥을 지어 > 호돌이 보온 도시락통에 정성껏 싸 > 장대한 아들과 남편을 보내놓고 > 조용히 허무하다. > (중략) > - 엄마의 하루 * [[http://parkwanseo.com|홈페이지가 개설되어 있다]]. * 2010년대 후반 들어 대학교 대나무 숲에 [[가난]]을 간증하거나, "가난이 스펙이다"라고 말하는 등의 망언이 올라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에 대해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의 문구가 올라와 일침을 가하곤 한다.--다른 버전으로 도둑맞은 아싸, 도둑맞은 찐따가 있다-- >"부자들이 가난을 탐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에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 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 선배 작가 [[박경리]]와 친분이 깊어서 박경리의 장례식에서 울면서 조사를 읽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친했던 것은 아니다. 등단하고 얼마 후 박경리와 알게 되었지만 같은 세대인데도(박경리가 박완서보다 5살 많음) 쉽게 친해지지 못했다. 자신은 막 등단한 신인인데 박경리는 이미 유명한 작가라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대상으로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과 아들을 연달아 잃고 슬픔에 빠져 집에서만 지내던 때, 친분이 있던 출판계 인사들이 찾아와 싫다는 사람을 잡아끌고 다짜고짜 강원도 원주에 있는 박경리 집으로 데려갔다.[* 박경리도 박완서와 똑같은 슬픔을 체험한 인물이었다. 6.25때 남편을 사실상 잃었고(정확히는 실종), 아들은 당시의 열악한 시대상에 따른 의료 사고로 일찍 떠나보낸 것이다. 박경리의 초기 단편인 <불신시대>는 그러한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쓰여졌다.] 그 무렵 다른 사람들은 박완서를 보면 으레 위로의 말을 건네곤 했는데, 극심한 절망감에 빠져있던 박완서는 그런 위로의 말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박경리는 어설픈 위로의 말 같은 건 하지 않고 직접 농사지은 채소로 밥을 차려주며 많이 먹으라는 말만 했다. 박완서는 그런 박경리의 태도에 오히려 큰 위로를 받아 울면서 밥을 먹었고 그 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