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준규(1925) (문단 편집) == 생애 == [[1925년]] 9월 12일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 묘동(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서 아버지 박노익(朴魯益, 1888. 7. 3 ~ 1958. 1. 27)과 어머니 [[칠원 윤씨]](1885 ~ 1942. 12. 8)[* 윤재학(尹在學)의 딸이다.]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하빈면 묘리는 일명 '묘골마을' 이라하는 [[순천 박씨]] 집성촌. 현재 묘골에 있는 [[박팽년]] 등 [[사육신]]을 모신 육신사 앞에 그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대구수창초등학교|수창공립보통학교]](22회)와 [[경북고등학교|경북중학교]][* 당시는 중-고교 분리 전이라 6년제 중학교였으며 경북고 졸업기수는 25회다.]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마츠야마 [[구제고등학교|고등학교]]를 거쳐 [[구마모토대학|구마모토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8.15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로 편입하였다가, 전과하여 [[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정치외교학부|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미국에 유학하여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한 후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강사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달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조재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5년 [[조병옥]]의 비서관이 되면서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발을 들였고,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성곤]]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4.19 혁명]] 후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민주당 구파에 속하였으며, 같은 해 말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1960년)|신민당]]을 창당하였다. [[5.16 군사정변]] 후 군부가 창당한 [[민주공화당]]에 합류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외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신민당(1967년)|신민당]] [[정운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으나, 같은 해 [[10.2 항명 파동]]으로 김성곤이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직을 사퇴하여 치러진 경상북도 달성군-[[고령군]] 선거구 재보궐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달성군-고령군-[[경산시|경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여 무소속 [[박주현(1923)|박주현]]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79년까지 민주공화당 의장서리를 역임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종기(정치인)|김종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민주공화당 당의장에 임명되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가 1984년 해금되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북고 후배인 [[노태우]]의 요청으로 [[민주정의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복귀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동구(대구)|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통일민주당]] [[목요상]]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88년 12월 [[https://imnews.imbc.com/replay/1988/nwdesk/article/1816735_29513.html|민주정의당 대표위원으로 임명]]되어 1년 동안 재임하였다가 1989년 12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탈당, [[민주정의당]] 해체, 양당제 정계 개편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다가, 당 내분으로 사퇴하였다. 이후 1990년부터 1992년까지 13대 국회 후반기 [[대한민국 국회의장|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4대 국회가 개원하자 13대 후반기에 이어 다시 [[대한민국 국회의장|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한 후 공직자 재산 공개 과정에서 [[https://news.joins.com/article/2796291|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고 [[https://news.joins.com/article/2796432|국회의장 직과]]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199307010013148885|의원 직을]] 모두 사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와 갈등을 빚었는데 박준규는 수십년간 친구로 지내온 김영삼이 원래부터 큰부잣집에서 태어나 재산이 많았던 자신의 사정을 잘 알면서 정치적 의도로 가지고 몰아붙인다 여겼다. 몇년 뒤 정권 중반에 접어들면서 지지율이 하락하며 아쉬워진 김영삼이 청와대 회동을 제의하며 손을 내밀었을 때도 박준규는 거절하였고 나중에는 역시나 김영삼 정권에서 험한 꼴을 당했던 [[박태준]]과 함께 김대중을 지지하기에 이른다. 1995년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자 합류하여 당 최고고문이 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 후보로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유성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DJP 연합을 성사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이는 박준규가 1공화국과 2공화국 시절 [[김대중]]과 함께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몸을 담고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데 기인한다.~~하지만 김대중은 신파, 박준규는 구파~~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박준규는 여당으로, 김대중은 야당으로 진로를 달리 했지만 인간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박준규의 활약은 대구경북에서 [[김대중]]의 득표율이 상승하는 데(8.7%에서 13.1%로 상승) 기여했다. 후일 김영삼 정권 출범 직후 상술한 재산공개파동으로 청와대로부터 국회의장직 사퇴에 몰릴 때 정작 김대중은 한나라의 국회의장을 저런 식으로 대우하는 건 옳지 못하다고 여겨 평민당 의원들에게 박준규를 과하게 비난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고 이에 대해 박준규가 매우 고마워했다고 한다. 15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선거에서 공동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국회의장 단일후보로 지명되었고, 국회의장 선거에서 무려 3차 투표까지 간 끝에 의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장 3선의 고지에 올랐다. 한편 [[한나라당]]에서는 [[오세응]]이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하고 [[조순]] 총재 이하 지도부 전원이 국회의장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는 후유증을 겪었다. 15대 국회 임기 종료와 동시에 정계를 은퇴했으며, [[2014년]] [[5월 3일]] 세상을 떠났다. 또한 공직자 자격으로 동년 5월 7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