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지철 (문단 편집) === [[롯데 자이언츠]] === [[주형광]]과 입단 동기로 [[1994년]]에 입단했는데, 실제 입단할 때는 [[동래고등학교 야구부|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무도 불러 주는 구단이 없어서 입단 테스트를 거친 다음에야 연봉 600만원의 [[육성선수|연습생]]으로 입단했던 철저한 무명 투수였다. 1994년은 롯데 주축 선수들의 상당수가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홈 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해 선수층이 많이 얇은 관계로, 성적보다는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해로 방향성을 잡은 해였다. 그로 인해 개막전 선발을 프로 입단 후 투수로 전업한 1차지명 신인 [[강상수]]가 맡았고, 그제껏 거의 [[원 포인트 릴리프]]나 패전처리로만 기용되던 [[가득염]]이 그 시즌 풀타임 [[선발 투수|선발]]로 활약했을 정도였다. 박지철도 그런 팀 사정 덕택에 연습생 신분이었음에도 개막전부터 1군 엔트리에 들 수 있었고, 실제로 개막전에서 3번째 투수로 등판하며 1이닝 1피안타 1탈삼진 무실점이라는 나름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신인 첫 해 주로 [[중간계투]]나 패전처리로 1군 14경기에 등판, 32 2/3 이닝을 던져 2.2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같이 입단했던 600만원의 연습생 멤버들 중 유일하게 정식 계약으로 살아남은 케이스. 1995년에 롯데는 위에서 언급한 [[방위병]]들이 대거 제대하여 돌아와 전력이 급상승한 덕택에 [[1995년 한국시리즈]]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준우승을 기록했는데, 박지철은 이해 [[중간계투]] 겸 땜빵 선발로 활약하며 팀에서 없으면 아쉬운 레귤러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3차전 연장전에서 [[김상현(1968)|김상현]]의 뒤를 이어 패전처리로 등판했으나 실점하지는 않았다.6차전에도 등판하였다.] 당시만 해도 초반부터 치고 나가는 팀이 아닌 포스트시즌 진출을 놓고 다투는 팀들은 잡을 경기는 확실히 잡고 버리는 경기는 버려 버리는 전략이 대세였는데, 이 해 롯데에서는 이렇게 버리는 경기의 [[선발 투수]]를 박지철이 거의 전담해서 맡았다. 아직 주축 선발투수들보다 기량이 모자라 많은 피안타와 사사구를 허용하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5~6이닝을 꾸역꾸역 버텨준 덕택에, 롯데로서는 당초 버리려 했던 경기들이 해 볼만한 경기로 바뀌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으며, 실제로도 심심찮게 승리를 따내곤 했다. 시즌 성적은 5승 4패 3.96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1996년부터 에이스 [[윤학길]]의 부상과 [[염종석]]의 시즌 아웃으로 인해 풀 타임 선발로 활약했는데, 약간 호리호리한 체형이었지만 위에서 내리꽂는 투구폼으로 약 145 km/h 언저리의 직구 스피드를 기록했다. 하지만 성적은 대단히 좋지 모해 이 해 1승 9패 [[평균자책점]] 4.70의 부진한 성적을 남기며 밑천이 드러난 게 아니냐는 의심도 들었지만, 1997년에 드디어 포텐이 터졌다. 이 해 특유의 낙차 큰 커브를 앞세워 14승 5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45를 기록해 롯데의 에이스로 대활약했다. 올스타전에서 당시 최고 타자 [[이종범]]을 풀 카운트 끝에 폭포수 커브로 헛스윙 삼진을 잡았던 장면이 그야말로 백미. 이 때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시즌이 한창일 때 [[김현욱(야구)|김현욱]]과 박지철은 다승왕을 비롯한 여러 타이틀 경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박지철이 농담조로 "너무 열내지 말고 사이좋게 타이틀 나눠먹자"라고 했는데, 그 말이 있고 나서 갑자기 김현욱이 폭풍처럼 승을 쓸어담아 버렸다(...). 이 해 만약 박지철이 단독으로 했든 공동으로 했든 다승왕을 했다면 꼴찌팀에서 다승왕이 나오는 진기록이 나올 뻔 했다. 1997년의 대활약을 밑바탕으로 자신감을 얻었지만, 그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은 오른쪽 어깨 부상. 이 심각한 오른쪽 어깨 부상 때문에 1998년 2승 11패 방어율 7.73의 극도의 부진을 보였고, 어깨 수술로 1999년 시즌을 통으로 날렸다. 때문에 전설의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1999년 플레이오프]] 때도 불참.[* 그렇긴 한데, 2013년 6월 26일 사직 NC전에 있었던 1999년 레전드(펠릭스 호세, 박정태, 주형광, 마해영 등)들이 롯데 구단의 초청을 받은 행사에 초대되어 참석하기도 했다. 예우 차원에서 초청한 것으로 보인다.] [[https://www.youtube.com/watch?v=oSWXRk7kStM|영상]] 2000년에 복귀하여 6승 9패 방어율 4.60을 기록했다. 2001년에는 다승왕 [[손민한]]을 받치면서 13승 7패 4.03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선전했으나, 야구 팬이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롯데의 암흑기인 '''[[8888577]]'''이 시작된 때라 결국 가을 야구는 경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은퇴할 때까지 가을야구는 더 이상 못 했다. 2002년에는 시즌 초반 선발진의 한 축을 맡았으나, 5월 1일 한화전에서 어깨 통증을 호소한 뒤에 강판되었고, 검진 결과 근육 일부가 손상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결국 시즌 아웃되었다. 이후 2003년에 8승 7패 3,89, 2004년에 9승 7패 3.87으로 활약했으나 2004년에 어깨 부상이 재발하여 많은 이닝을 던지지 못하게 되었다. 2005년엔 예전과 다른 저조한 행보를 이어가다가 2006년에는 롱 릴리프로 꽤 좋은 모습을 보여 주며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2007년 갑작스런 구위 저하로 거의 2군에만 머물다가 시즌 후 롯데에서 방출당했다. 롯데 방출 당시 나이가 고작 32세밖에 안 된 것으로 미뤄서, 짐작컨대 더 이상 재기하기 힘들다고 구단 측에서 판단한 듯. 박지철은 롯데의 암흑기인 '''[[8888577]]'''이 시작되던 시기 [[손민한]]과 함께 롯데 선발진의 축으로 고군분투하지만, 2004년 이후 어깨 부상이 재발하여 많은 이닝을 던지지 못하게 되었다. 은퇴 후 본인의 말에 의하면, 2002년부터 어깨 통증이 재발했으나 참고 던졌는데, 그게 일이 커졌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