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찬종 (문단 편집) === 몰락 === 1994년 [[통일국민당]] 잔류파와 합당하여 [[신민당(1994년)]]을 창당하였으나, 각목 전당대회 파문으로 이미지에 상처만 남긴 채 탈당하였다. 1995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그 과정에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그래서 해당 지역구는 1996년 6월까지 무주공산이었다.]초반에는 압도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앞세워 지지율 1위를 달렸으나,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과 [[자유민주연합]]의 암묵적인 지원을 얻은 [[조순]]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건 2위로 낙선했다는 점인데 [[정원식]]은 前 국무총리 + 여당후보였음에도 3위로 낙선하면서 정치 생명이 끝났다.] 이 당시 신민당에서 각목 전당대회로 앙금이 쌓여있던 [[김동길]]은 [[이정희|오로지 박찬종을 떨어뜨리기 위해 조순 선거운동에 가담했다며]] 박찬종을 가리켜 "무균질 인간? 웃기지 말라고 그래요. 뱃속에 병균이 와글와글해요"라는 비난까지 쏟아냈다.[* 사실 박찬종이 정치인 초기에 [[차지철]]과 친하게 지낸걸 생각하면 자업자득이긴 하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에 전격 입당하여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이때 [[통영시]] 유세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을 처벌하지 않았다면 전라도 데모대들이 국가를 위기로 빠트렸을 것"이라는 [[지역감정]] 조장 발언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22800289104004&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6-02-28&officeId=00028&pageNo=4&printNo=2491&publishType=00010|#]] 파문이 일자 박찬종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최대 피해자가 전라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 표현이었을 뿐"라고 해명했으나,[[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22900289104007&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6-02-29&officeId=00028&pageNo=4&printNo=2492&publishType=00010|#]] 지역감정을 조장한 상식 이하의 발언으로 비난을 받았고 당시 [[5.18 민주화운동]]시민연합은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는등 지탄을 받았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22900329123013&editNo=30&printCount=1&publishDate=1996-02-29&officeId=00032&pageNo=23&printNo=15696&publishType=00010|#]] 신한국당이 예상보다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전국구 의석을 18석 확보하는 데에 그쳐 21번으로 등록했던[* 원 지역구인 [[서초구 갑]]은 관선 서울특별시장을 마치고 원외 인사 신분이었던 [[최병렬]]이 공천되었고, 박찬종에게는 당선권인 전국구 2번 자리가 돌아갔으나 당과 후진을 위한다는 이유로 애매한 번호인 21번으로 옮겼고 결국 낙선했다.] 박찬종이 낙선한 것은 덤. 낙선 이후 문민정부에서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의 공로 치하와 낙선에 대한 보상 격으로 정무장관 자리를 제의받았으나 사양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김대중]]에 이은 2위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당내 기반이 전무했던 탓에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을 중도 포기하고 탈당했다. 이후 [[국민신당(대한민국)|국민신당]]에 입당하여 [[이인제]]를 지지하였다. [[1998년 재보궐선거#s-3.1.2|1998년 7월 재보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였던 서울 서초갑에 출마하였으나 3파전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무색하게 8.7%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4위에 그쳤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2000년)|민주국민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부산광역시 중구-동구 선거구에서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정의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2년에는 [[이회창]]과 화해하고 [[제16대 대통령 선거]] 운동을 도왔으나, 이회창은 낙선하였다. 2002년 부로 독도의 주권이 일본에 넘어간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등 또다시 구설수로 잠시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부산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유기준(1959)|유기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후로는 사실상 정계를 떠나 본업인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다. [[BBK 주가조작 사건]], [[판사 석궁 테러 사건]], [[미네르바 사건]], [[JYJ|동방신기 노예계약 사건]], [[김기종#s-6.2|주한일본대사습격사건]] 등을 담당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