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흥식(기업인) (문단 편집) === 해방 이후 === 광복이 되어서도 [[https://wspaper.org/article/3096|노동자 자치위원회 관리 시기]]를 빼곤 그의 왕성한 기업활동은 변함이 없었다. 1945년 11월 조선비행기공업을 조선기계공업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쌍용그룹]] 계열 금성방직에 매각하였다.[* 이후 해당 부지는 금성방직 안양공장으로 운영되다가 1967년 쌍용이 [[대농|대한농산]](현 대농)에 매각했고, 1977년에 다시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일반인에게 매각된다. 현재는 평범한 주택단지로 변한 상태. 위치는 경기 안양시 안양 3동.][* 사실 [[쌍용그룹]]이 [[쌍용양회|시멘트 사업]]에 진출하기 이전에는 섬유 산업이 주력이었다. 금성방직 외에도 안양 진흥아파트 자리에 있었던 태평방직을 인수, 경영했었고 1970년에는 [[강원도]] [[정선군]]에 [[견직물|생사]]([[生]][[絲]])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 12월에는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홍콩 등지에 해산물과 인삼 등을 수출했고, 1947년 10월에는 재단법인 흥한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에 취임했다. 이 와중에 미군정청이 일반 시민에게 배급할 화신의 포목과 잡화를 불법으로 매매하여 400만원의 폭리를 취득하고, 비행기회사 청산정리자금으로 일본 육군성에서 받은 5,000만원 가운데 2,00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1946년 2월 기소되었다.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에 벌금 200만원을 구형받았으나, 1946년 5월 무죄가 언도되었다. 1948년에는 화신무역을 통해 국내 최초로 한국 국적 무역선 '앵도환'을 취항시켜 영국령 홍콩에 홍삼을 수출했고, 12월에는 원산항까지 출항하려 했으나 1949년 1월에 북한 당국이 '친일 반동분자의 재산'이라 하여 압수했다. 같은 시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어 1949년 1월 5일부터 시행됐는데, 박흥식은 1월 11일 제 1호로 구속 수감된다. 박흥식이 제일 먼저 체포된 이유는 미국 도피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과 함께,[* 1948년 반민법이 제정되자 부인과 함께 미국비자를 발급받았다. 지금은 미국비자를 발급받는 것이 대단히 흔한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외교관 이외에는 외국 구경도 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박흥식이 반민법 제정 후 비자를 발급받은 것은 신문에도 기사화될 정도였다.] 미군정 수도경찰청 청장을 지낸 [[장택상]]의 형 장직상과 만나거나 현직 경찰 [[최난수]]에게 수사금을 지원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박흥식 체포는 특조위 제 3조사부에 그가 곧 도망칠것이라는 제보에 따라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박흥식은 특조위 조사관 이덕근이 시경에서 차출해온 형사들과 4층 집무실로 들이닥치자 뒷문열고 비상구를 통해 화신 옆골목으로 통하는 어두운 계단으로 빠져 도망치다가 체포되었다.] 박흥식은 다른 반민족행위자들과 함께 매일 특별검찰들의 엄중한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반민특위 활동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 의해 활동이 유야무야된다. 박흥식은 구속 3개월 만인 4월 21일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그 해 9월 26일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 그 어려웠던 일제 하에서 이 겨레의 상권을 수호했고 민족자본 육성의 기수로서 한민족의 긍지와 명예를 떨쳤다. 그러므로 친일파로서의 기소사실은 편파적이었다. >---- > 반민특위 재판부의 무죄 판결 이유 중에서. 석방 이후 그가 이끈 화신은 이승만 정권의 비호 하에 [[삼성]], [[LG|락희]],[* 현 LG그룹의 전신.] 대한,[* [[대한전선]], 대한방직, 대한제당의 모체.] 삼호,[* 전 계명대 이사장 의양 정재호(1913 - 2005)가 세운 재벌그룹.] [[삼양그룹|삼양]], 개풍[* [[대한유화]]의 모체.] 등과 더불어 1950년대 10대 재벌로 군림해왔었고, 1950년 한일무역협정 타결 당시 사절단으로 활동한 뒤 1955년 신신백화점을 세웠으나, 화신은 끝없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우선 해방 후 터져버린 [[6.25 전쟁]]으로 인해 그의 기반이었던 유통업의 경기가 [[영 좋지 않은 곳|영 좋지 않았고]], 1957년 미국 [[웨스팅하우스]] 사와 대리점계약을 맺고 1958년 정부에 원자력발전소 건립 계획안을 내보기도 했지만 모두 무산되었다.[* 1950년대 들어서 미국은 핵무기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대대적으로 외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 종전 이후 이승만 정권도 경제발전을 위해선 원자력발전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서 1956년 [[한미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고 이공계 인재들의 미국 아르곤 연구소 연수, 실험용 원자로 도입,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설치 등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미국의 원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그야말로 돈과 사람을 쥐어짜서 원자력 도입에 집중한 것이다. 박흥식의 원전 건설 계획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지만, 아직 기반이 잡혀 있지 않은 상태라서 유야무야 무산된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부정축재 혐의로 잡혀가기도 했으나 금세 풀려난 후 경제재건촉진회 발기인으로 나섰다. 1963년 인천도시관광을 세워 송도해수욕장 및 송도유원지를 개발했고, 1964년 막대한 외자를 투입해 화학섬유 제조업체인 흥한화섬[* 이 회사는 훗날 산업재해와 환경오염으로 수백명의 사망자를 남긴 악명 높은 '''원진레이온'''이 된다. [[원진레이온 사태]] 항목만 보지 말고 '원진레이온'으로 한번 구글이나 네이버에 검색해봐라. 얼마나 흉악무도한 회사였는지.]을 설립해놓고도 실적 부진으로 고작 1년여 만에 [[한국산업은행|산업은행]]으로 넘겼다. 1960년 서울 [[장충단공원]]에 '소화낙원(小花樂園)'이란 놀이동산을 세우고 1961년 종로 신신백화점 뒤편으로 옮기며 '신신놀이터(해피랜드)'로 바꿨지만, 운영미숙과 비싼 요금으로 인해 부잣집에서나 왔다갔다하는 수준에 머물면서 대차게 말아먹어 1966년 [[대한석유공사]]에 부지를 팔았다. > 난 아딕 늙디 않았디오, 현역입네다. >---- > 1968년 10월 흥한화섬 부도 당시 그가 남긴 말.[* [[1961년]] [[5.16 쿠데타]] 발생 당시 [[박정희]]를 가장 먼저 찾아간 기업가가 박흥식이었다.] 1972년 3월 14일에는 화신전기(주)를 세워 미국 [[웨스팅하우스]] 사와 합작해 냉장고를 생산했고, 이듬해 9월 1일에는 일본 [[소니]]와 합작으로 화신쏘니(주), 11월 13일 일본 레나운 합작사 화신레나운(주), 1975년 1월 31일에는 미국 금융업체 타이거리싱그룹과 합작해 화신타이거리싱(주)를 각각 세우는 등 재기를 기도했으나, 직후 터져버린 [[오일쇼크]]로 나빠진 경기와 국내의 타 경쟁회사에 비해 낮은 실적을 보이는 것에 실망한 소니측이 자본금을 회수하여 돌아가버리는 바람에 또 다시 부도를 냈다. 이 와중에 그룹의 본가라고 할 수 있던 화신백화점 역시 차남 박병찬이 말아먹고 해외로 도피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귀국하긴 했다. 이렇게 1980년에는 파산선고를 받아 그룹이 해체되어 1981년에는 화신전기가 부도를 냈고, 화신타이거리싱은 [[SC제일은행|제일은행]] 및 씨티은행해외투자회사(COIC), 화신레나운은 동일방직에 각각 넘어갔다. 1985년에 화신백화점까지 팔고 흥한재단, 광신학원, 인천도시관광([[송도유원지]])[* 2006년 동원투자개발(현 싸이칸홀딩스)에 매각.]을 장남 박병석에게 물려준 후 판교 쇼핑센터 등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53100099207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6-05-31&officeId=00009&pageNo=7&printNo=6229&publishType=00020|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이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1989년에는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52700209206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9-05-27&officeId=00020&pageNo=6&printNo=20816&publishType=00020|자택마저 팔아치운 뒤]][* 종로구 가회동 177 - 1. 박흥식은 1931년부터 1988년까지 57년간 거주했으나, 자금난으로 경매에 부쳐졌다. 이후 이 저택에는 무역업자인 박우준이 낙찰받아 거주하다가, 2000년 2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매입하여 말년을 보내기도 했다.] 파킨슨병 및 담석증과 싸우며 은거하다 1994년 향년 92세로 서울대병원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을 두고 당시 재계에서는 '민족자본가 1호'가 별세했다며 애도했다. >“내가 한참 뛸 때 이병철씨(삼성)는 양조업을 하고 있었고 정주영씨(현대)는 자동차를 수리했다”. >---- >과거 언론과의 인터뷰 중에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