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가사유상 (문단 편집) === 국보 제78호 === [include(틀:대한민국의 국보)] ||<-3><:>{{{#!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cfs4.tistory.com/download.blog?fhandle=YmxvZzEzMjkwNUBmczQudGlzdG9yeS5jb206L2F0dGFjaC8wLzI0LmpwZw%3D%3D.jpg|width=100%]]}}} || ||<-3><:> '''{{{+1 [[대한민국 |{{{#FFFFFF 대한민국}}}]][[대한민국의 국보|{{{#FFFFFF 의 국보}}}]]}}}'''[br]''{{{#ffffff National Treasures Of Korea}}}'' || ||<-3><#ffffff> [[파일:문화재청 CI_좌우.svg|width=150]] || ||<|3><:> '''공식명칭''' ||<:> 한글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 ||<:> 한자 ||<:>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 ||<:> 영어 ||<:> Bodhisattva in pensive position || ||<:> '''분류번호''' ||<-2><:> '''{{{+1 {{{#F39100 국보 제78호}}} }}}''' || ||<:> '''소재지''' ||<-2><:>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 '''분류''' ||<-2><:>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 ||<:> '''시설''' ||<-2><:> 1구 || ||<:>'''지정연도''' ||<-2><:>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2><:> [[삼국시대]] 6세기 초반[* 이 반가상은 고구려, 백제, 신라 제작설이 모두 존재한다.]|| 국보 제78호의 경우 [[일본인]] 골동품상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에게 바쳤던 것을 총독이 [[조선총독부]] 박물관(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신라 제작설이 가장 우세한 편이긴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 제작설도 상당히 심도 있게 거론되고 있다. 특히 신라 제작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경상북도 봉화군의 석조 반가사유상의 하반신 옷주름이 판박이다. 신라 제작설의 경우에는 신라에서 불교, 특히 미륵사상이 가장 유행했다는 사실과 이로 인해 삼국 모두 반가사유상을 제작하긴 했지만 신라에서 특히 유행해 많이 제작되었다는 점이 주 근거로 활용된다. 그리고 출토 장소가 명확하진 않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출토되었다는 증언이 존재하는 점[* 영주 초암사(草庵寺)라는 절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 백제 제작설이 언급되는 보물 331호 반가사유상이 인체를 길쭉하게 표현한 것에 비해 78호 역시 다른 신라계 반가사유상 유물들과 체형 묘사가 닮았다는 점이 있다. 한편 백제 제작설의 경우 이 불상의 양식이 83호처럼 전형적인 신라 양식이 아닌 백제 양식에 가깝다는 점(정작 그 가깝다는 백제 양식은 무얼 말하는 지 실체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 논거로 활용되며 고구려 제작설 역시 이 상이 전형적인 [[북위]]의 양식을 따르는데 이 양식이 고구려에서 널리 유행했다는 점을 주 논거로 활용한다. 실제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지낸 강우방 박사는 78호 사유상에 대해서 문화 전파경로와 [[고구려]]에 전해진 북위 [[불교]]미술 양식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고구려]] [[불상]]으로 판단한 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