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문단 편집) == 평가 == 반민특위의 활동은 '''실패'''하였다. 이는 친일세력이 그 후에도 한국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길을 열어줬다고 평가된다. 때문에 뒤늦게나마 당시 인물들의 친일 행적을 밝혀 내야 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애로 사항이 배로 꽃피게 되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증거 확보가 어려워 정말로 [[친일인명사전]]에 실려야 할 악질적인 인물들의 행각은 묻혀 버렸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일본 제국|남]]이 싸놓은 [[친일반민족행위자|똥]]을 너무 오랫동안 치우지 않고 방치하다 보니, [[친일반민족행위자|똥]]인지 [[독립운동가|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이는 자연히 선정 기준의 형평성 논란으로 이어지니 제때 친일 청산을 안 한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예컨대 독립 투사를 잡아들여 온 행위와 군국주의 가요를 부른 대중 가수를 비교한다면 당연히 전자의 죄가 훨씬 크다. 하지만 애초에 잡아들여 처벌을 받았어야 할 거물급들은 자신의 증거를 열심히 인멸해 명단 수록을 피한 반면, 당시에도 반민특위의 관심 밖이었던 대중 가수들의 친일 가요는 우연찮게 레코드라는 물증이 남아 사료(史料)로서 명단에 실리게 된다면, 진짜 크게 욕 먹어야 할 사람들은 미꾸라지마냥 운 좋게 빠져나가게 되므로 피라미급들이 역사 기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후자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무조건 쉴드를 치자니, 그런 핑계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진다는 게 문제다. 게다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자발성 여부 확인도 쉽지 않다. 친일파 청산에 관하여는 진보, 보수 진영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다르다. 보수 진영은 국가 건설 등의 이유로 청산에 소극적이고, 진보 진영은 친일파 재산환수, 진상규명 등을 외친다. 당시 입법권과 사법권을 동시에 행사했다는 반민특경대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 그러나 반민특위 하의 특별조사위원회는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조사와 그 내용을 특별검찰부로 보내는 역할만을 담당하였고, 기소와 재판 등 사법적 내용은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하에서 이루어졌다. 특경대는 특별조사위원의 조사를 보조하기 위한 조직이었지 사법권까지 행사하는 조직은 아니었다. [[http://db.history.go.kr/url.jsp?ID=dh_010_1949_01_06_0080|자기신변 보호를 위해 호신용 무기를 휴대했다고...]] 특경대의 권력 남용에 대해서 논란이 된 것은 앞에서 지적된 [[노덕술]]의 체포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경찰의 대부분이 피의자 내지는 피의자의 계열이었기 때문에 체포에 관한 경찰의 업무를 특경대가 침해했다는 논리는 그때부터 있었고 이것은 [[노덕술]] 체포로 가시화 되고 있다. 사회, 문화적으로 어떤 공로가 있어도 친일파로서 활동한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면죄부가 주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위에서 언급한 [[최남선]]이나, [[윤치호]] 등을 들 수 있다. 참고로 반민특위 친일파 명단에 기초자료로 활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김승학의 [[http://ask.nate.com/qna/view.html?n=4540822|친일파 명단 원고]]에도 그들의 이름이 나온다. 김승학의 명단에는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와 [[동아일보]] 사장 [[김성수(1891)|김성수]], 보성전문학교 교수 [[여운홍]], 공산주의 이론가 김오성과 인정식, 대한민국 국무총리 [[장면]], 소설가 이광수 등 당시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사들이 포함되어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주로 시국강연이나 [[내선일체]], 창씨개명에 동조하는 논문 등을 기고하는 활동을 했었다. [[민족]]이라는 가치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오류를 범해서도 안 되지만, 잘못된 역사는 그에 따른 재평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참고로 가짜조사관이 [[http://db.history.go.kr/url.jsp?ID=dh_010_1949_01_29_0030|한]][[http://db.history.go.kr/url.jsp?ID=dh_011_1949_04_29_0080|두]] 번이나 돌아다닌 게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말썽도 있었는데, [[http://db.history.go.kr/url.jsp?ID=dh_012_1949_06_18_0060|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옛날의 [[고소드립]]... 게다가 [[http://db.history.go.kr/url.jsp?ID=dh_013_1949_08_29_0050|부정회계도 있었다.]] [[http://db.history.go.kr/url.jsp?ID=dh_011_1949_04_16_0100|권한이 강했는데 김상돈의 경우 지프차를 운전하다가 어린이를 치어죽이고도 과실치사로 처리해버렸다.]] 치어죽였을 뿐 아니라, [[http://db.history.go.kr/url.jsp?ID=dh_015_1949_12_20_0060|멋대로 매장하거나,허위문서를 작성했다.]] 특경대는 반민특위 외에도 대간첩 특경대도 있었다. [[http://db.history.go.kr/url.jsp?ID=dh_010_1949_02_15_0220|혼동하지 말자.]] 반민행위자들의 서적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10_1949_02_11_0090|#]]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11_1949_03_24_0090|여담으로 반민특위 피의자들은 호화로운 감방 생활을 했다]]. 한편 이 실패로 인해 이승만은 본인이 독립운동가 출신이고 이후에도 반일 성향을 매우 뚜렷하게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 세력과 결탁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아예 이승만 본인이 친일 성향이라는 [[친일몰이]]까지 당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