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문단 편집) === [[적반하장|친일파의 비겁한 변명]] === 일부 우익진영이 친일파 청산을 반대하는 근거는, 당시 "처벌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 처벌한다"라는 주장과 "광복 후에 인재풀이 '친일' 안 한 사람 중에 있었나? 고등교육 받은 사람은 전부 친일파들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게, 민족말살기로 접어들면서 한국어(조선어) 교육까지 금지되고 한국인(식민지 조선인)들은 써먹기 쉬우라고 초등교육 외에는 잘 시켜주지도 않고, 일반인들은 학교 갈 돈은 커녕 먹고 살기도 어려워 광복 직후 문맹률이 '''78%'''에 달했던 시기에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건 운 좋게도 조상이 조선 시대 양반이라 남겨준 돈이 많았던가, 일제 체제 하에서 일본인들과 부대 끼며 그만한 지위를 만들었던가 둘 중 하나다. 그리고 전자라면 몰라도 후자 쪽은 진짜 친일파랑 선을 긋기가 참 애매했다. [*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을 때 일부 보수세력에서 반발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민주당]]의 주장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는데, 반민특위 결성 당시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친일파 세력들은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이 '일제강점기 때 동네이장을 맡았다'는 경력 하나를 들어 '친일파'라고 하는 등의 주장을 걸기도 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도 40년대 이후 국내 독립운동 세력이 거의 없어졌다는건 인지하고 있었고[* 그나마 [[경성콤그룹]], [[조선건국동맹]] 정도가 있었다.] 그렇기에 당시 일본 교육기관을 나왔다고, 일제에 협력했다고 전부 청산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당시 독립운동가들 만으로는 새 국가를 이끌만한 인력 풀이 부족한 상황에서[* 문맹률이 80%에 육박하던 상황에서 인재풀은 굉장히 좁을 수밖에 없었는데, 일제강점기가 한 세대에 가까운 35년 동안 지속되었다보니 어느 정도 행정에 능통한 공무원들과 법에 능통한 법조인들은 크건 작건 일제에 협조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말단 경찰과 공무원들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는데, 이들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간주하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범위가 너무 넓어질 판이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어느 정도는 '친일파' 라도 향후 대한민국에 도움이 된다면 데려갈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사실 반민특위 명단을 잘 보면 저기 적힌 친일파들은 단순히 '고등교육 받은 자들은 친일파들이었다!!' 라고 포장할 수준이 전혀 아니었는데, 전술한 상황에서조차 반민특위 명단에 오른 이들을 보면 [[조선귀족]] 작위를 습작하거나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조선총독부 공인 친일파였다던가, 일제에 막대한 금액을 헌납한 자본가들[* [[박흥식]], [[문명기]] 등]이었다던가, 대놓고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자들[* [[노덕술]], [[하판락]]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고등계 형사들과 [[배정자]], [[이종형]] 같은 밀정 등.] 등 한마디로 '''그 당시 기준으로도 도저히 눈 뜨고 못봐줄만큼 일제에 적극적으로 부역했거나 한국인들을 핍박한,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남겨놔도 하등 도움이 안 될 사람들'''이 절대다수였다. 공무원, 법관 같은 실무 부역자들과 말단 경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 친일 행위로 비판받는 경우인, 일본 군대에 자원 입대했거나[* [[박정희]], [[정일권]] 등] 일제를 찬양한 지식인이었다거나[* [[김활란]] 등] 일제를 찬양하는 예술 작품을 만든[* [[서정주]], [[김은호]] 등] 정도로는 [[이광수(소설가)|이광수]], [[주요한]][* 이들은 압도적으로 많은 친일 문학 작품들을 만든 사람들이라(특히 이광수는 '''100편이 넘는다''') 다른 친일 문학가&예술인처럼 일제의 강압으로 친일 작품을 만든 것일 가능성도 있다는 아주 최소한의 정상참작도 불가능하다. 애초에 강압적인 민족말살정책 시기를 감안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친일 작품을 '''양산'''했다는 것은 이들의 친일 행각이 확실히 자발적인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처럼 아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 [[최남선]]과 [[최린]]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인물이라 이광수, 주요한이랑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힘들다.] 아예 반민특위 명단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리고 행정 안정화를 이유로 이런 인사 정책을 감행했다면 적어도 뽑힌 인사들이 성실하고 정직하게 직무를 수행하게끔 통제하여야 했으나 그러지도 않았고, 그 결과 친일파들이 매국노 짓해서 벌어들인 돈을 유지한 것은 물론이고, 정부에 뿌리를 박고 온갖 종류의 부정부패를 저지르는데도 제지할 수단이 마땅치 않은 사태에까지 치닫게 되었다.[* 다만 이건 식민지배 시대에서 독립한 수많은 독립국들의 가장 대표적인 국가막장루트였다. 구 열강들이 배상금이나 독립지원금이랍시고 주는 돈이 국가 발전이 아니라 부패한 기득권층들 주머니에 들어가면서 독재자와 그 측근들은 호화저택에서 수영장까지 짓고 지내는데, 옆에서는 국민들이 굶어죽어나가고 있던 나라가 한둘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말해, 행정상 필요하다는 이유를 대며 친일파를 등용해놓고는, 그들을 통제하기는 커녕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다니게 내버려둬서 이승만 정부의 부패상을 만들어낸 거다. 거기다 독립운동가 250명을 탄압해 무려 17명의 목숨을 앗아간 일제 관동군 밀정 출신 [[이종형]] 같은 악질 친일파들은 반민특위가 결성되자 '망민법'이라고 대차게 까고 '반공집회'를 열면서 자신들이 '반공투사이자, 애국자'라는 등 [[정신승리]]질하면서 다녔다. 특히 이종형은 '반민 특위 조사관들 중에도 친일 경력자들이 있다'라는 등 유언비어들을 퍼뜨려 여론조작하는 등 공작을 벌이기도 했고, [[이종형]]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재판장에서도 오만 망언을 쏟아부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0008996|#]] [[http://db.history.go.kr/url.jsp?ID=dh_011_1949_03_10_0110|반민특위에서는 반박했다]]. 심지어 [[이승만]]이 한민당과 사이가 벌어져서 갈라진 시기, 즉 이승만의 친위 세력(주로 족청 계열)이 뒷날 1952년 [[자유당]]을 결성하고 자유당의 반대 세력이 민주당([[한민당]] → [[민주국민당|민국당]] → [[민주당(1955년)|민주당]])을 결성한 후에 이승만은 지속적으로 '''[[민주당(1955년)]]은 친일 세력이 집권한 정당이므로 민족정기를 위해서 찍어주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자유당이나 민주당이나 둘다 독립운동가 출신과 친일파 출신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자유당이나 군과 경찰 내의 일제 경력자들의 일제 부역 행위에 대해선 함구하는 자세를 보여왔다. 그 외에 반민특위가 돈을 뜯으려고 했다든가, 죄 없는 사람에게도 적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의 근거는 친일파 재산 몰수와 이들이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것. 친일파 재산 몰수야 반민법에 따른 것이고 보석으로 풀려난 거는 당시 친일파들이 가지고 있던 [[경찰]] 빽으로 풀려난 건데 그걸 돈 뜯으려고 만들었다는 것의 근거로 활용한다. 실로 훌륭한 인과의 역전이자 [[정신승리]]. 의외의 사실로 [[황옥(1887)|황옥]]의 경우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 친일행위를 하였는데 반성하였는지 이 반민특위에 참여가 가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