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월성 (문단 편집) === 역사 === 반월성은 정확한 학술 발굴 조사 이전까지는 [[태봉]]의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었으나, 조사 결과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밝혀졌다. 대략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최초 축성은 백제가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본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49263&cid=51888&categoryId=53626|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포천 반월성]],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724764&cid=49345&categoryId=49345|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민족 전투) - 반월산성]]][* 하지만 고구려가 만든 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3,04030000,31&pageNo=1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 포천 반월성 (抱川 半月城)]]] 하지만 이후 5세기 중엽 고구려의 [[장수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반월성도 고구려의 성으로 넘어가 약 1백년 가량 고구려의 영역으로 있었으나, 6세기 중엽부터 [[신라]]가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한강 유역을 영토로 확정]]하고 한강 이북 지역까지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7세기 초엽에 들어서 반월성도 신라가 차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신라가 반월성을 점령한 이후인 [[통일신라]]시기에 접어들면서는 군사전략적인 요새보다는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49263&cid=51888&categoryId=53626|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포천 반월성]]] 하지만 통일신라 이후 [[후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반월성의 전략적인 이점이 다시 떠오르면서 군사기지로 부각하는데, 궁예가 수도인 [[태봉국 철원성|철원성]]을 방어하는 목적으로 반월성을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20세기말 들어 시행된 학술 발굴 조사 이전까지 반월성을 궁예가 쌓았다는 이야기가 내려온 것도 이러한 점에서 비롯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724764&cid=49345&categoryId=49345|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민족 전투) - 반월산성]]] 그러나 궁예의 태봉이 멸망하고 [[고려]]기 들어서면서 반월성은 버려진 상태로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반월성은 군사기지로 잠시 다시 활용되는데 이때도 성채를 재건하지는 않고, 남아 있는 일부분만 재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성을 개축하여 [[인조]] 1년인 1623년까지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1563&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포천반월성지]]] 이는 [[후금]]이 처들어 올 시에 방어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반월성을 재활용 한 것이다. 이렇게 반월성을 재활용 하면서 중군(中軍)도 성에 주둔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인조가 즉위하면서 중군을 해체하였고, 이와 함께 반월성은 버려져 딱히 수행하는 역할도 없이 점차 폐허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49263&cid=51888&categoryId=53626|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포천 반월성]]] 이를 증명하듯이 막상 [[병자호란]]이 발발 했을 때엔 반월성은 광해군의 노력이 무색하게 별다른 역할을 하지도 못했다. 1899년에 발간된 '포천군읍지(抱川郡邑誌)'[* 참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58206&cid=46618&categoryId=46618|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포천군읍지]]]에는 '고성 반월산성은 돌로 쌓은 것으로, 둘레가 1937자[尺]이고, 가운데에 우물이 2개소 있고, 사방으로 갈라지고 가파르며 지금은 폐(閉)하여졌으나 수축(修築)하지 못하였다.'고 서술되어 있어서[*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92903&cid=40942&categoryId=33539|두산백과 - 포천 반월성]]] 인조때 반월성이 버려진 뒤 폐허로 남겨진 채 내려왔던 것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