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일 (문단 편집) ==== [[홍콩]] ====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잘 모르는 또 하나의 일제 침략의 피해국. 일본이 점령했을 당시 [[중국인]]이 많이 학살당하고, 홍콩의 언어인 [[영어]]와 [[광동어]] 모두 사용금지되고 일본어만 쓸 것을 강요받고, 강제 지명 변경 및 [[창씨개명]],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대규모 [[마루타|생체실험]]까지 겪은 엄연한 피해자인데 한국인들은 잘 모른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대규모의 육군 [[기병]], [[기갑]], [[포병]] 부대를 [[광둥성]]에서 [[구룡반도]]로 남하시키고, [[일본 해군]]이 [[홍콩 섬]] 코즈웨이 베이에 함포사격을 퍼부어 해안방어를 하던 [[영국 해군]]의 [[해병대]]를 제압한 후 대규모의 육전대를 상륙시켜서 점령해 버렸다. 당시 구룡에는 [[중국 대륙]]에서 [[중일전쟁]]을 피해 피난 온 광동과 푸젠 출신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 중엔 국부군들도 많았고 당연히 이들은 일본군이 진주하자 낭패를 봤다(...) 일본군은 [[침사추이]]에 입성한 후 페닌술라 호텔[* 이 호텔의 이름은 동아(東亞, 일본식 발음 토야)호텔로 개명당하고 일본 육군사령부로 전락한다.]에서 조용히 최후를 기다리던 총독에게 항복을 받아낸다. 문관 총독이 오던 홍콩은 전혀 전쟁 준비가 안되어 있었고 법관 출신이었던 당시 총독 역시 본국이 멀쩡히 살아 있음에도 불구 겁을 먹고 투항한다. [[인도차이나]]가 본국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당해 [[비시 프랑스]]라는 괴뢰국으로 전락해 할수 없이 투항한 것과 다르다. 호텔을 접수한 일본의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은 호텔을 임시 육군 사령부로 만들고, 육군 병력이 보트를 타고 빅토리아 하버를 건넌 해군 육전대와 합류하며[* 해군은 대규모의 함포 공격을 완차이와 코즈웨이 베이 그리고 영국의 해군 사령부가 있는 애드미럴티에 퍼부어 영국 해병대를 제압하고 상륙한다. 당시 영국 해군의 초계함은 거의 격침당했고 현재 [[성공회]] 교회인 성 요한 교회에서 저항하던 중국인 의용군과 영국 해병대, [[홍콩 경찰]]의 [[경찰|경찰관]]들은 전멸당한다. 현재 이 교회에서는 이들을 순국 선열들로 기리고 있다.] 곧 이어 [[홍콩 경찰]] 및 [[홍콩 소방처]] 그리고 주둔 [[영국 해군]] 사령부 등을 해체하고 계엄령을 내려 [[일본 제국 육군]]의 [[일본 제국 육군/헌병|헌병]]들이 대신 치안을 전담한다. 당시에 일본군은 빅토리아 피크에 홍콩신사, 라이언 락에 구룡신사를 짓고 [[홍콩인]]들에게 참배를 강요했으며 [[홍콩 섬]] 코즈웨이 베이나 [[구룡반도]] 홍함 등에선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고[* 주로 의용군을 비롯한 반일 인사들, 망명한 중국 피난민들, 영국령 치하에서의 경찰관이나 관리 등이 학살 대상이었다. 재판 없이 학살한 건 당연하다.] 수많은 화인들을 카이탁 공항 활주로 확장공사에 [[강제 징용]]해 원성을 산다. 그러나 카이탁 공항은 차라리 나았던 것이 화인들이 징용으로 끌려간 곳은 카이탁 공항뿐만이 아니었고, 당시 광둥 성의 일부였던 [[하이난]] 섬으로 2만여 명의 화인들이 2만여 명의 본토인들과 함께 징용으로 끌려갔는데 이들 4만여 명 가운데 살아온 사람들은 겨우 5천 명이었다고 한다. 흔히들 [[일뽕]]이나 [[일본]] [[우익]]들이 홍콩이 대만처럼 [[친일]] 성향이 강하다는 말을 해서 홍콩이 친일 성향이 강한 줄 아는 경우가 많으나, [[홍콩]]의 경우에도 본토 못지않게 반일감정이 심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4년간 [[일본]]에게 점령되었던 역사가 있고[* 홍콩에서는 이 일본의 강점기를 '''3년 8개월(三年零八個月)'''이라 부른다.] 그 사이 현지인에게 한 잔학 행위가 꽤 많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이 시기에는 일본의 수탈이 극심해 사람들이 대규모로 아사하거나 심지어 [[식인|사람을 잡아먹기까지 했고]](이 시기에 굶어죽거나 병으로 죽은 사람만 5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수많은 화인들이 광동 성으로 추방당해 일본의 점령 이전 160만 명이던 홍콩의 인구가 해방 직후 60만 명으로 쪼그라들었으며, 전술했다시피 화인들이 학살당하거나 징용을 끌려가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문제나 역사 교과서 왜곡 등이 터지면 홍콩 내에서 홍콩 [[극우]]들이 반일 시위도 한다. 그리고 본토계 피난민들이 많은 [[구룡반도]]에선 [[일본어]]를 쓰고 다니면 좋은 시선을 못 받는다. 몇몇 노인들은 대놓고 일본어를 쓰면 고함을 치며 욕을 할 정도다. 가끔 구룡에선 일본인 택시 승차거부도 일어나기도 한다. 대만에서는 "[[식민지 근대화론|대만을 근대화시켜주신 일본인들께 감사드립니다]]"라는 팻말을 건 택시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완전히 다른 수준. 홍콩에서 이러면 집단다굴당할 가능성이 높다. 2017년에는 홍콩의 반일단체가 홍콩 주재 일본총영사관이 입주한 빌딩 인근의 육교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소녀상 2개를 설치했다. [[https://www.news1.kr/articles/?816624|중국서 이틀째 격렬한 반일시위…50여개 도시 8만명 거리로]] 그렇지만 평범한 일본인이나 일본 문화에게는 우호적이다. 특히 젊은층으로 갈수록, [[본토파]]일수록 반일 의식이 약한 편이다. 사실 이건 젊은층의 본토 [[중국인]]과 [[한국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해서 일본 우익이나 [[정치인]],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